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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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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치훈이가 처음 일본에 왔을 때는 일본말은 커녕 한국말도 능숙하지 못할 때였다. 또 치훈이는 자기가 한국말을 하면 일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한국말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고 무심코 말을 꺼내다가 곧 중단해 버리는 버릇이 들었다.
의사가 전연 통하지 않으니까 답답해 하다가 결국은 말을 더듬는 버릇까지 생기고 말았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심해져 10세쯤에는 아주 더듬고 말았다. 그와 얘기할 때는 형인 나도 가슴이 답답할 정도였다.
이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나는 갖은 노력을 다했고 본인도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고치려고 조금씩 애를 썼다. 그래서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나아지기 시작, 지금은 거의 낫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완전치는 못하다. 어려서 부모를 떠나 외국에서 공부를 하느라고 생긴 것이기 때문에 옆에 있는 나는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런 일들로 해서 치훈이는 요즘도 사람들과 말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특히 신문 TV 등의 「인터뷰」는 딱 질색을 하고 있다. 조금 편견적인 생각이지만 치훈이는 세계의 제1인자, 그것도 전무후무한 기록의 보지자가 되기 위해서는 바둑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몰라도 좋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치훈이는 바둑 이외에도 썩 잘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운동은 건강을 위해 내가 권하는 탓도 있지만 수영·「스케이팅」·「볼링」(평균 2백점) 등을 잘하고 있다. 특히 수영을 잘해서, 오히려 내가 배워야 하는데 웬일인지 난 수영에 소질이 없어 이번 여름부터는 아예 치훈이가 나에 대한 수영교습을 포기하고 말았다.
치훈이는 또 여자들한테 인기가 대단하다.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여자친구들이 집에 찾아오더니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일본 국내는 물론 한국에서까지 연애편지가 오는 바람에 나의 걱정거리가 또 하나 늘었다.
일본기원에서도 치훈이를 염려해서 그에게 오는 편지를 일단 나에게 맡겼다. 나는 모든 편지를 검열(?)한 후 건전한 편지만을 전해주곤 했는데 한번은 검열을 하다 치훈이에게 들키고 말았다. 치훈이는 남의 인권을 왜 침해하느냐고 정색을 하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항의를 받고 오히려 치훈이가 다 큰 사람이 된 것 같아 대견스러웠다.
치훈이는 음식은 아무거나 잘 먹고 체중도 53kg으로 적당하고 키는 165cm. 외모로 보면 완전한 어른 같지만 얼굴은 아직도 어린 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치훈이의 기풍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받는데 한마디로 무어라고 표현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인 면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나이이기 때문에 기풍까지도 자주 변하는 모양이다. 요즘은 상대에 따라 자기의 방침을 적당히 바꾸어 가는 그런 식인 것 같다.
별항 기보는 이번 선수권전 도전자선발 준준결승전에서의 대「이시다」(석전방부) 9단과의 대전. 1974년을 온통 혼자서 주름잡다시피한 「이시다」는 현재 명인·본인방·왕좌 등 3개의 「타이틀」을 가지고있고 일본기원 선수권전에서도 두 번이나 우승한 일본 바둑계의 제1인자.
「컴퓨터」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치훈이와는 같은 「기다니」문하의 형제이기도 하다.
치훈이는 이 바둑을 이긴 다음 도전자가 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질 수 있었고 이어 준결승에서 대죽 9단, 결승에서 임해봉 9단을 물리치고 결국 최연소 도전자의 기록을 세우고 말았다. <조상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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