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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북의 한상 이성사씨(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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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40년 여름 상해에 도착한 이씨는 친구 김창식씨의 하숙집에서 3일을 묵으며 상해구경을 하고 바로 목적지 한구로 갔다.
상해에서 한구로 갈 때는 양자강을 오르내리는 1천t급 연락선을 탔는데 한구까지 3일이 걸렸다.
한구에서 이씨는 예정대로 이복현씨가 경영하는 동흥탄광의 경리사원으로 취직했다.
월급은 2백원, 당시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이씨는 길림에서 1등 번역사 자격을 땄는데 이 자격증이 있으면 어느 직장에서나 20원을 더 받을 수 있었지만 이처럼 많은 급료를 준 것은 이복현씨의 배려였다.
회사원생활은 평온했으나 한번은 팔노군에 잡혀 죽을 고비를 넘긴 일도 있다. 당시 한구는 일본이 점령한지 3년째 접어들어 동흥광산 본사가 위치한 시내에는 치안이 확보되어 있었다.

<일에 협력한 것 대라 고문>
그러나 일본은 넓은 중국대륙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고 철로와 도시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구에서 몇 걸음 나가면 국부군이나 중공의 팔노군이 우글대고 있었다.
동흥탄광의 광구는 한구에서 뱃길로 하루쯤 걸리는 혼춘이란 곳에 있었는데 이 지역은 팔노군 출몰지역이었다.
하루는 새 광구를 탐사하러 가는데 이씨도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같이 근무하던 강씨라는 친구와 따라 나섰는데 산간지대에서 팔노군과 맞부딪쳤다.
이씨 일행은 한국인 강씨 외에 중국인 4명이었는데 이씨와 강씨는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처음 초록군복을 입은 군인 7∼8명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강씨는 권총을 뽑아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중국인 일행이 팔노군이니 염려 말라고 강씨를 말렸다.
무장한 군인들은 일행 중 중국인 4명은 그 자리에서 방면했으나 권총을 가진 한국인 두 사람은 포승으로 결박해서 어디론지 끌고 갔다.
그들은 심문도 않은 채 2일간을 계속 행군, 다음날 저녁에 본부인 듯한 곳에 도착했다.
여기서 심문을 받았는데 요컨대 일본사람에게 협력한 사실을 대라는 것이었다. 다 알고 있다며 때로 고문도 하고 위협도 했으나 끝까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버티자 3일만에 권총만 뺏고 석방했다.
체포당할 때 대항했다면 꼼짝 못하고 죽을 뻔했다고 이씨는 지금도 그때를 악몽처럼 회상했다.
이 일을 빼고는 안일한 나날이 계속됐다. 그리고 그는 이런 생활에 염증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씨는 조용히 앉아 사무나 보는 일이 맞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일과 모험을 찾아 현실을 박차는 태도가 오늘날 이씨로 하여금 이역에서 몸을 일으키는 바탕이 됐다고 볼 수도 있다.

<일 군량미 조달…부수입 올려>
어쨌든 그는 광산회사의 경리사원 생활을 1년6개월만에 집어치우고 현지의 지방을 돌아다니며 잡곡을 수집해서 군에 납품하는 일본인 회사에 취직했다. 41년 겨울이었다. 봉급은 월 3백원이었다. 여기서 이씨는 일본이 항복하기 2개월 전까지 일했다.
이번에 이씨가 하게 된 일은 사무를 보는 게 아니라 「트럭」에 소금과 광목을 싣고 다니며 곡식과 바꾸는 일이었다.
도회지에서는 일본화폐가 통했으나 지방으로 들어가면 일본 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아 물물교환을 해야 했다.
당시 일본은 동남아로 전선을 확대시킨 끝에 진주만기습(1941)으로 미국과도 전면전에 돌입, 전쟁물자가 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군량미 조달사업은 계속 호경기를 누렸다. 일본이 점령한 도시에서 중국인들에 의해 생산되는 제품이 일부는 직접 군수품으로, 일부는 군량미로 바뀌어 일본군 전선에 보내질 때였다.
일에 익숙해지면서 물물교환 과정에서 부수입도 생겼다. 싸게 매입해서 비싸게 파는 등등. 이씨는 당시 3백원의 월급 외에 부수입만 월 l천∼3천원씩 생긴 때도 있다고 털어놓는다.
45년에 접어들면서 정세가 긴박해진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같은 회사에 운전사로 있던 한국인 천 모씨는 이곳이 위험하다며 가족이 있는 만주로 떠나기도 했는데 이씨는 천씨 편에 그동안 번 돈으로 황금 10여냥을 사서 화전 가족에게 전해달라고 맡겼다.
45년 봄이 되자 한구 이웃의 중공군 활동이 활발해졌고 같이 근무하던 중국인들은 일본인 지배지역을 벗어나야 살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이해 6월 이씨는 한구에서 자동차로 4∼5시간 거리에 있는 사시라는 곳으로 탈출, 장개석 군에 가담했다.
같이 한구를 탈출한 중국인 동료들의 보증으로 이씨도 중국인으로 행세, 이때 이성사란 중국식 이름을 새로 지었다.
중국 국적도 만들었다.
일본말을 잘하는 이씨는 중국군 육전구 특무대에 소위로 배속되어 특수임무를 맡게 됐다.

<패잔 일군에 대한 공작도>
어제의 일본군 군수물자 조달원이 오늘은 다시 일본군에 대한 공작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씨의 행적은 나라 없는 백성이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이었다.
일본의 패망으로 중공군과 함께 다시 한구로 돌아온 이씨는 중국군 무한경비사령부 계사처(지금의 군경합동수사반 비슷한 기구)에 근무하며 패잔 일본군, 일본민간인의 처리를 맡았다.
당시 무한삼진에는 일본군 군단사령부가 있어 이 일대에 15만명 정도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민간인도 1만명 이상이 있었다.
한국인도 3천명 정도 됐는데 대부분 위안부들이었다.
무장해제 된 일본군과 민간인들은 장개석의 이덕보원(원한을 덕으로 갚는다)하는 아량으로 모두 일본으로 송환됐다.
이씨는 46년 직속상관인 완성장 중령(현 중국보안사 부사령·중장)이 해군으로 옮길 때 그를 따라 해군 정보처로 옮겨 49년5월 상해를 거쳐 대만으로 떠날 때까지 남경에서 해군 장교로 근무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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