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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 내란음모 판결문에 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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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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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지방법원 제12형사부 판결….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 판결문을 구해 보니 숨부터 막힌다. 473쪽. 웬만한 책 한 권 분량이다. 판결문을 펴면서 궁금했던 건 재판부가 왜 내부제보자 이모(47)씨 말을 신뢰했느냐였다. 이씨는 지난해 5월 두 차례에 걸친 회합 과정을 녹음하고 이른바 RO(혁명조직) 가입 및 활동 내용을 법정에서 진술한 논쟁 속 인물이다.

 “우리의 수(首)가 누구인지를 묻고 ‘장군님’이란 대답을 듣는 등의 의식을 행한 후 강령과 5대 의무를 고지하고 ‘남철민’이란 조직명을 부여하면서…세포모임은 7~10일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데….”

 그의 진술을 믿을 만하다고 재판부가 판단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신이 경험한 사실의 주요 부분에 대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고 ▶조직 활동 과정에서 겪은 많은 일화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확신에 찬 자세로 진술에 임하고 변호인들의 집중적인 반대신문에도 거침없이 답변하고 있다. 재판부로선 일관성·구체성·태도, 3박자를 갖춘 증인인 셈이다.

 두 번째 물음은 이석기 의원 등의 주장이 왜 받아들여지지 않았느냐다. 가장 큰 원인은 혐의를 부인하는 변론내용 자체에 있었다. 변호인단은 지난해 5월 회합에 대해 “반전평화활동의 전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비공개 정세강연회를 주최한 것”이란 주장을 폈다. 토론 과정에서 나온 무장·파괴 등의 발언에 대해선 “강연 취지를 곡해한 일부 발언자가 우발적·충동적으로 언급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 의원 자신도 최후진술에서 “전쟁을 준비하자는 게 아니라 민족공멸을 막기 위한 반전(反戰)을 준비하자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녹취록 전체 맥락을 보면 반전평화 활동으로 읽히지 않는다. 판결문은 “이석기 강연 후 조직적인 국가 기간시설 등의 파괴활동 방안에 관한 논의가 중점적으로 이뤄졌다. 구체적인 반전평화 활동은 논의된 바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효과적인 방어 전략은 “시민들의 상식과 거리가 있는 발언이 오갔지만 내란음모는 아니다”는 게 아니었을까. 한 판사 출신 변호사의 말이다.

 “일부 열성적인 당원들이 단합 의지를 다지는 ‘유사 부흥회’ 정도로 설명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반전평화 활동이라고 강변하다 보니 설득력도 떨어지고, ‘사회적 위험성이 없는 집회’라는 주장을 부각시킬 기회도 잃은 것 아닌가.”

 그러한 카드를 선택하기는 앞으로도 힘들지 않을까. 이 의원은 물론 당 전체의 위상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과 이 의원에게 자존심이냐, 재판이냐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 올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을 것이다.

 세 번째 물음은 지난해 5월 모임에 실질적 위험성이 있느냐다. 판결문은 “그 위험성이 실로 높다”고 답하고 있다. “130여 명의 조직원들을 동원하여 전국적인 범위에서 일제히 국가 기간시설 파괴 등의 후방 교란 활동을 구체적으로 모의하였는바, 국헌문란의 목적으로 한 지방의 평온을 해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폭동을 모의한 것이라고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수원지법 재판부가 법과 양심에 따라 위험성을 따졌을 것으로 믿는다. 다만 녹취록과 진술로 짜인 ‘내란음모’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는 피부로 다가오지 않는다. 2심과 3심을 거치며 보다 폭넓게 논의돼야 할 문제다. 나는 그 토론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의 안정성이 높아지고 건전성이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판결문을 읽은 소감을 말하자면 착잡함이다. 카페○○나 ○○리아, ○○설렁탕 등 카페와 식당에서 “수령님”과 “장군님”을 논하며 ‘사상학습’을 하는 이들의 모습(판결문 57~72쪽)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한 사회의 판결문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욕망과 지성과 윤리의 수준을 보여준다. 그들의 생각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