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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그 입지의 현장을 가다-대북의 한상 이성사씨(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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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23년 그리고 25년 한반도는 수마에 휩쓸렸다. 논·밭이 물에 잠기고 애써 심어 놓은 농작물이 떠내려 갔다.
천재가 없어도 가난했던 농민들은 한해 걸러 닥쳐온 홍수 피해로 초겨울에 접어들면서 벌써 끼니가 간 데 없는 집이 늘어갔다.
일제의 수탈과 겹친 천재로 생활 근거를 잃은 백성들은 유랑민이 되어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중국으로 살 곳을 찾아 떠났다. 25년 겨울, 이처럼 고향을 떠나가는 유랑민의 대열에 평남 안주가 고향인 4살짜리 이종순 아기가 어머니의 등에 업혀 만주로 흘러 들어갔다.

<인화지 수요량의 80%공급>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오늘, 이종순 아기는 이역 만리에서 3개의 기업체를 거느린 실업인으로 성장했다.
성부섭영재료창고빈유한공사(주식회사) 총경리(사장) 이성사씨(54·대북 시장 안동로 2단 67호)가 바로 그 장본인.
이씨는 인화지 생산 회사인 「성부」외에 형통고빈유한공사와 통성행이라는 두개의 무역회사도 함께 경영하고 있다.
특히 「성부」는 대만에서 유일한 인화지 생산 업체로 대만 인화지 수요량의 80%를 공급하고 있는 독보적 기업이다.
공장은 대만에서 자동차로 2시간30분쯤 걸리는 남쪽 신죽현 신포진 중로40에 자리잡고 있는데 대지 4천평에 건평 7백평 규모.
이곳에서 65명의 중국인 종업원들이 컴컴한 암실 근무를 하며 월8만평방m의 인화지를 생산, 공급하고 있다.
일반 종업원은 중국인이지만 공장장 등 기술 관계 책임자는 모두 한국인이다.

<책임자는 모두 한국서 초빙>
현재 공장장 오종운씨를 비롯, 생산 과장 이영백씨, 품질 관리 과장 김창수씨, 공정과장 김해권씨 등 4명의 한국인이 본국에서 초빙되어 근무하고 있다.
이씨가 68년에 15만「달러」를 들여 세운 「성부」의 현 자산 규모는 대략 1백만「달러」(5억원). 중국인 종업원들에게 지불되는 임금이 월1만「달러」(5백만원)쯤 된다. 「형통」무역과 「통성」상회도 규모는 작지만 대한 무역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통성」은 1954년 이씨가 처음 한국산 사과와 대만산 「바나나」의 교역을 시작하면서 설립한 회사로 개인 돈 2천「달러」로 시작한 것.
이에 비해 「형통」은 56년 중국인 교모중씨와 합작으로 설립한 것으로 개인이 운영하던「통성」만으로는 급증하는 거래량을 감당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외국인이 경영하는 사업의「핸디캡」을 해소하기 위해 현지인과의 합작 형식을 빌어 설립한 것.
어쨌든 이들 2개사가 모두 대한무역에 종사하는데 이 2개회사 창구를 통해 이씨가 취급하는 교역량은 연5백∼1천5백만「달러」에 달하고 있다.
이씨의 무역사업이 「피크」를 이루었던 1968년에는 당해 연도 대한 수입의 70%, 대한 수출 50%가 이씨의 손을 거쳤다.

<「성실」 「겸손」… 중국인에 신임>
이씨가 이처럼 한·중 무역에서 깊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성실」과 「겸손」을 신조로 살아온 이씨의 사람됨이 중국인들의 신임을 끌어 모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54년 한국으로부터 3만 상자의 사과를 처녀 수입하는데 성공, 대개에서 한국통으로 인정을 받게 됐기 때문.
당시 대만에서는 한국산 사과에 대해 수요가 컸으나 번번이 수입에 실패했다가 이씨가 처음으로 거래를 트는데 성공했었다.
이래서 지금 까지도 대만 업계 일부에서는 한국과 거래를 하려면 이씨를 통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대만 사회의 이 같은 신용을 기반으로 이씨는 62년 처음 한국으로부터 홍삼 20만「달러」어치를 수입하는 등 한국 상품의 대만 진출에 큰 공을 세웠다.
54년 이씨가 3만 상자 6만「달러」어치를 사들여 감으로써 시작된 한국산 사과의 대만 수출액은 73년에는 1백만「달러」를 넘어섰고 홍삼 수출액은 1천8백58만「달러」에 달하고 있다.
이씨가 취급하는 제품은 이밖에 오징어·판초자·「아스팔트」·「시멘트」 등 다양하나 최근에는 양국 경제 발전으로 특화 산업이 없어져 가고 있는 데다 경쟁자가 늘어 한국 교역량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이씨가 취급하는 물량은 오히려 줄고 있다.
이씨가 68년 성부 인화지 공장을 시작한 것도 이러한 추세를 내다 본 그의 사업가다운 조처였던 것이다.
이씨는 이같이 기업 경영에 진력하는 한편 대만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들과도 깊은 유대를 맺고 있다.
60년부터 61년 사이에는 교민 회장일을 맡아보며 자비로 사무실을 얻고 총무의 봉급까지 지불했다.

<교포 대부분이 선원·노동자>
5·16후 본국 정부에서 교민회를 위한 보조금이 지급되어 형편이 나아지자 회장일을 그만 두었다가 금년8월 다시 교민들의 권고로 회장일을 맡고 있다.
현재 대만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는 2백가구 6백96명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선원, 혹은 노동자로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의 대부분이 2차 대전 때 징용으로 끌려 왔다가 아무 생활 기반도 마련 못한 채 이곳에 버려진 사람들인 때문이다.
이들에게 이씨가 세운 「성부」 인화지 공장은 커다란 위안이요, 긍지를 주고 있다. 본국에서 부임하는 외교 공관장도 이 공장을 으례 방문하며 이씨로 대만 거주 교민들을 공장에 초청, 대접하곤 한다.
눈보라치는 겨울 어머니 등에 업혀 만주로 유랑의 길을 떠난 이래 전화가 끊이지 않던 중국 대륙을 전전하면서 한국인의 의지를 심은 이씨의 생애는 만주로 흘러간 망국 유민이 겪은 고난의 역사이기도 하다. <대만=신성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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