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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건을 무더기로 처리한 일요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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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리 국회에는 고쳐지지 않는 고질이 있다. 예산안을 다루는 연말 국회가 늦부지런을 부려, 끝판에 여러 안건을 무더기로 처리해 온 일이다. 금년에도 이 폐습은 고쳐지지 않았다. 일요일인 1일, 국회 본회의는 새해 예산안을 비롯해 무려 76건의 법안·동의안을 불과 5시간만에 통과시켰다. 더우기 이 급행 처리는 야당의원이 참석치 않은 가운데 이루어져 개운치 않다.
등원을 거부해 온 신민당은 3일부터 국회에 출석키로 결정해 놓았었다. 어떤 이견이든 간에 국회에서 토론되고 정리되는 것이 의회 정치의 본령이기 때문에 원외 투쟁에 관한 찬·반과는 다른 차원에서 야당이 국회에 들어가야 한다는 견해는 합리적이라고 평가돼야 한다.
신민당의 등원 결정은 실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수를 비롯한 소수의원은 등원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신민당은 괴로운 정책선회로써 등원을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당측은 이를 기다려 줄 아량 없이 모든 안건을 쫓기듯이 처리해 버렸다.
물론 예산안은 그 처리의 법정 시한이 12월 2일이기 때문에 2일을 넘기기 어려웠겠지만 3일부터 등원하겠다던 신민당 의원들에게 조금이라도 앞당겨 등원할 것을 종용해, 하루라도 기다려 주는 성의가 여당측에 왜 없을까.
정기 국회 회기는 12월 18일까지다. 다른 의안은 법정 시한이 있는 것도 아니며 며칠을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시급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일요 국회에서 그마저 서두를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76건의 안건은 국민의 부담과 직접 연결되는 세법·동의안 등이 대부분이다. 국회가 상임위원회 중심이기 때문에 상위에서 충분한 예심을 거쳤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대부분의 의안은 야당이 불참한 상위에서 심의된 점을 고려에 넣는다면 본회의 심의는 야당과 함께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여당측은 절대 다수의 의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의안의 처리에도 그다지 힘들지 않다. 설혹 야당측에서 예산 규모의 삭감이나 법안의 수정 또는 반대가 있더라도 충분한 토론과 조정을 거친다는 데에 의회주의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소수의 반대 의견이 귀찮다는 이유 때문에 절차를 서두른다면 그것이 비록 법적 하자는 없더라도 정치적으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개헌 논의, 민주 회복 논의가 있고부터 정국의 평온한 진전을 위해 여야의 대화는 어느 때 보다도 절실하다. 이러한 계제에 야당의 등원을 기다리지 않고 여당이 서둘러 일을 처리한 것은 유감된 일이다 여당이 의안 처리를 너무 서두름으로써 야당을 자극할 뿐 아니라, 속결했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는 억측을 낳을 우려도 있기 때문이다.
신민당은 여당의 단독 졸속 국회 운영을 놓고 『파국으로 몰고 가는 일』이라고 비난하고 있는데, 많은 국민은 정국의 파국을 바라지 않는다. 여당측은 일방통행이 가져올 정국의 경화를 막고 대화의 정치를 이어나갈 배전의 성의와 노력을 보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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