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한류를 위하여

중앙일보

입력

중국은 지금 한창 설 명절이다. 올해도 변함없이 고향에 돌아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음력으로 섣달 그믐인 지난달 30일은 중국인에게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이었을 거다. 한 해의 마지막 밤, 가족들이 모여 지나가는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건 중국의 오랜 풍습이다. 식사 후엔 가족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텔레비전을 켰다. 그런데 중국 CC-TV의 ‘춘완’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에서 한국의 인기배우 이민호가 등장하는 게 아닌가. 그는 중국에서도 유명하기로 손꼽히는 가수들과 함께 등장해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노래들을 불렀다.

시청자가 8억 명이 넘는 이 프로그램은 중국에서도 최고의 연예인들만을 초청해 무대를 꾸민다. 놀라운 것은 이민호의 무대가 그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는 점이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엔 여러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무려 1억 개에 가까운 이민호 관련 글이 올라왔다.

이민호는 드라마 ‘시티헌터’나 ‘후계자’ 등과 같은 드라마가 중국에서 방영되며 최고의 스타로 등극했다. 많은 한국 배우가 중국의 드라마나 한·중 합작 드라마에 출연하며 인지도를 높인 것과는 다르다. 이렇게 순수 한국 드라마를 통해 중국 시장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민호를 보니 한류의 힘을 실감했다.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도 한류 이야기가 나왔다. 한국 드라마 매니어인 친구가 지난해 한국에 왔을 당시 이야기를 했는데 아쉽게도 쇼핑 얘기가 대부분이었다. 다른 추억은 없느냐고 묻자 “중국과 별로 다를 게 없던데”라는 답이 돌아왔다. 내 친구들만 그런 게 아니다. 중국인들은 한국 관광을 아예 ‘쇼핑 여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관광공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392만 명의 중국인 관광객이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1인당 2053달러(약 220만원)를 소비했다고 한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 온 관광객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였다. 물론 ‘큰손’으로 불리는 일부 중국인 관광객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중국인들이 한국에서 쇼핑하는 걸 즐기는 건 이제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지금 한국 관광업계는 중국인 손님들 덕에 환히 웃고 있지만 만약 향후 중국 정부가 관세를 높이는 방식으로 정책 방향을 바꾸거나 한국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나라, 즉 더 저렴하게 쇼핑을 즐길 수 있는 나라가 나타난다면 어떨까. 한국의 관광산업은 큰 타격을 받지 않을까 우려된다.

무엇보다 한국이 쇼핑이 아닌 문화나 역사와 같은 관광 자원으로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크다. 한국은 중국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가 부족하다. 중국인 관광객들은 2000년대 후반부터 한국으로 갑자기 몰려왔다. 그 과정에서 중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저렴한 상품을 집중적으로 개발하다 보니 부작용이 생겼다. 가격 경쟁이 과열되면서 여행사들은 쇼핑 관광에서 수수료를 챙기는 방식으로 적자를 메우기 시작했다. 가이드 인력도 모자라 전문 지식은 갖추지 못한 채 중국어만 조금 할 수 있다면 깃발을 들고 쉽게 중국인 관광객을 인솔한다.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가이드가 청와대·경복궁 같은 명소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30분 드릴 테니 알아서 보고 오시라”고 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반면에 이 관광 가이드들은 면세점에선 눈을 빛내며 “중국보다 이곳이 훨씬 싸니까 안 사면 후회할 것”이라고 쇼핑을 부추긴다. 쇼핑 장소에서만 친절한 것이다.

물론 이런 가이드만 있는 건 아닐 게다. 문화 아닌 쇼핑이 우선이라는 태도는 바꿔야 한다. 중국인들은 화려하고 젊은 느낌의 한류에 심취해 있으나 한국 문화의 깊이나 한국인의 정서는 잘 모른다. 중국인들에게 한국 문화를 체험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면 한국 관광은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천리 국립외교원 전임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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