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삼위」는 우리의 귀에도 별로 생소하지 않다. 일제 아래서 항일 투사들은 함경도의 나진을 지나 두만강을 건너 그리로 갔었다. 두만강은 겨울이면 얼음이 덮여 육로나 마찬가지였다.
이준 열사가 1907년「헤이그」만국 평화회의에 참석할 때도 이 해삼위에서「시베리아」횡단기차를 탔었다. 「하르빈」으로 가던 안중근 의사도 해삼위를 지나갔다.
3·1운동당시엔 해삼위에서도 유랑 독립 투사들의 기염이 담긴 선언문이 발표되었었다.
「해삼위」를 소련 지명으로는「블라디보스토크」라고 부른다. 『동방의 주인』이라는 뜻. 그 이름이 암시하듯 이 도시는 소련 동남단, 연해주의 주항이다. 마치 노천극장처럼 자리를 잡아, 뒤로는 금각만이 둘러 싸여 있고, 앞으로는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동해를 굽어보고 있다. 소련의 지도를 보면 이상하게도 이 도시의 지명은 기입되어 있지 않다. 그 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위지이다. 소련은 태평양으로 뻗는 함대의 기지를 여기에 두고 있다. 한반도의 북단과는 직선거리로 불과 1백60㎞(4백리)떨어져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1850년대에 탐험되어 1858년 애혼 조약에 의해 청국에서「러시아」로 넘어갔다. 「러시아」는 할양 받은지 두 해 만에 이곳에 수송대를 파견, 군사기지를 만들었다. 1880년대엔 벌써 연해주의 중심항구가 되었다.
「시베리아」횡단 철도와 연결된 것은 1903년. 「모스크바」와는 무려 9천㎞의 거리로 이 철도와 맺어져 있다.
19세기말엔 극동에 있어서「러시아」문화의 중심지로 유명한 동방 연구소가 개설되기도 했다.
「러시아」가 이 항구를 개발할 무렵엔 인력이 모자라 한국의 유랑 이민에게 널리 문호를 개방했었다. 지금도 많은 교포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혁명 당시인 1918년 봄엔 한대 반혁명군이 일어나 이 도시에「시베리아」임시정부가 수립된 일도 있다. 이것은 미·영·일군의 상륙과「체코슬로바키아」군대의 원조에 힘입은 결과였다. 그 임시정부는 1920년에 전복되고 말았지만 그 이듬해 미·일의 간섭에 의해 다시 반혁명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1922년10월 혁명군 잔당이 이곳을 다시 점령, 결국은「러시아」공화국에 합병되었다.
이런 곡절의 역사만 보아도「블라디보스토크」는 근대사의 중요한 무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으로서도 생소한 곳만은 아니다. 국제적인 의의가 있는 고장인 것이다.
겨울이면 항구는 얼어붙지만 쇄빙선으로 충분히 해로를 틀 수 있다. 조선·수산가공·건축자재·기계공업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미·소 정상회담이 한반도의 기상에 어떤 영향을 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