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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버체트」기자는 공산 첩자"|「6·25」참전 미군 포로들 호 법정서 증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한국 동란 당시 전쟁포로로 북괴에 억류되었던 전 미 공군 중위「폴·크니스」씨(일리노이주)는 최근 이곳 법정 증언에서 호주 출신 언론인「월프레드·버체트」(63)가 실제로는 미군 포로들의 세뇌 공작에 참여한 공산 간첩이었다고 말했다.
한국동란 때 미 공군 조종사로 참전했던「크니스」씨는 지난 24일 증언에서 눈물을 흘리면서「버체트」가 52년 미군 포로들에게『미 공군이 세균전쟁을 수행하고 있다』고 허위 진술을 하도록 종용한 장본인이라고 말했다.
「크니스」씨는「버체트」가 한국 동란 중 북괴의 선전전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고 비난하고 또「버체트」는 53년9월 포로교환 때 북괴에 남도록 설득하려 했다고 폭로했다.
「크니스」씨와 다른 3명의 전 미군 포로들은「버체트」가 지난 52년 북한에서 중공군 복장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하고「버체트」는 미 공군의 세균전쟁 수행설을 퍼뜨리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비난했다.
「버체트」가 기소된 것은 이번 주「시드니」의「뉴·사우드·웨일즈」주 대법원에서 있은 중상 청문회에서였다. 20년 이상「런던·데일러·뉴스」지 및 기타 신문들의 특파원 일을 해 온「버체트」는 1971년 그가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중공인과, 소련인들을 위한「스파이」활동을 했다고 비난한 기사를 쓴 극우파 전 상원의원「존·케인」을 고소했다.
「버체트」가 자신의 공산주의 옹호와 월남전 동안「베트콩」을 공개적으로 후원한 사실을 시인했지만「아시아」에서의 그의 역할은 이제까지 수수께끼로 알려져 왔다. 그는 호지명의 측근이었고 주은래를 포함한 많은 공산주의 지도자들과 상당히 가깝게 지냈다.
1963년「런던」으로 망명한 전 KGB직원「유리·크로트코브」의 진술서가 법정에서 낭독되었다.
「크로트코브」는 1960년 초기에「버체트」가 자기는『「하노이」당국에 고용되었다』며『한국동란 때 서방 특파원으로 가장하여 중공측에「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었다』고 자랑하더라고 증언했다.
이 진술서는 또「버체트」가 1957년「런던」에서 발행되는「데일리·익스프레스」지의「모스크바」주재 특파원으로 있을 때 소련의 유력 인사들만이 사는 지구에 있는 7개의 거실이 있는 호화「아파트」에서 기거했다고 밝혔다.
「캘리포니아」주「뉴포트」출신의「월커·마후린」공군대령은 이 증언에서 자기는 1952년 월맹의 한 촌락에서 체포된 지 90일 후에 무장한 월맹군의 안내로 어느 건물로 인도되었는데 그 당시 그 건물에서 4명의「아시아」인과「버체트」기자가 나와 환담을 나누었다고 말했다.
「마후린」대령은 또 자기가「버체트」기자와 두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버체트」기자는 세균 전쟁에 관해 물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던「폴·크니스」는 1952년3월과 1953년9월 사이에 북괴에서「버체트」와 두 번쯤 만났다고 증언했다. 「크니스」가 전쟁 행위에 관한 허위 자백에 서명을 한 후 그는 그 자백서 사본을 가진「버체트」와 만났다고 말했다. 『「버체트」는 허위 자백을 날조해 냈다고 나에게 말했다. 허위 자백서는 10여일쯤 재구성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말들은 삭제되었다.
자백은 한 조그만 전단에 기록되기 시작했으나 중공군들은 새로운 사실들, 특히 기술적인 숫자들을 삽입했다. 많은 변조, 심지어는 문법적인 변조도 서슴지 않았다』고「크니스」는 법정에서 진술했다. <「워싱턴·포스트」=본사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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