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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의 한자 교육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9일은 한글반포 5백28주년을 기념하는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에 의한 훈민정음 창제의 쾌거는 우리 조상들이 수백 년 동안 젖어온 사대적 한문화 숭상의 풍토 속에서 감연히 뛰쳐나와 우리민족의 문화적 주체성을 되찾았다는 점에서 비단 문화사뿐만 아니라, 정치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더우이 봉건 절대군주인 왕이 직접 나서 만백성들의 일용의 편리를 도모케 하기 위해 우리의「나라 말」을 다듬어 창제케 한 고사는 전세계의 역사를 통해서도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올 수 없는 일로서 유독 우리만이 이 문자창제의 기념일을 국경일로 기리는 뜻도 여기에 있다할 것이다.
근 5백30년 전에 다듬어진 어문체계로서의 한글이 현대적 수준에 비추어서도 탁월한 과학성과 일용 성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의 크나 큰 자랑임에 틀림없다. 오늘날 한국 민의 식자 율이 거의 선진국과 맞먹을 정도로 앞서 있을 뿐 아니라 한글 타이프라이터의 효율성이 다룬 어느 나라 것 못지 않게 탁월하다는 사실 등은 그 비근한 몇 가지 실례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는 주로 대중문화와 교육능률의 가속화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도 한글 전용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른바「한글 전용 논자」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없지 않으며, 우리도 모든 공용문서의 한글화와 대중매체 등에서의 한글전용화를 향한 미래지향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나 한글날에 즈음해서 다시 생각해야할 것은 한글이 가진 이 같은 어문체계로서의 우수성에 대한 예찬이 한낱 문화적 쇼비니즘(애국지상주의)의 소산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말과 글이 갖는 우수성이나, 과학성이라는 것을 그것과 전통문화와의 관련을 떠나서 운위한다거나, 하물며 범세계적인 시야에 선 현대문화와의 관련을 떠나서 자화자찬해도 좋은 것으로 착각한다면 이는 결코 정상일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한글문화에 관하여 본 난이 거듭 강조해야할 것은 한글전용과 한자교육의 필요성이 결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또 오늘날 우리가 쓰고있는 국어의 범세계 문화적 시야에서의 순화발전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본 난이 기회 있을 때마다 되풀이 강조한바와 같이 한글전용시책과 각급 학교에서의 문자 교육의 필요성은 결코 서로 모순되거나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나라의 언어문자가 갖는 기능에는 의사의 소통·전달 기능에 못지 않게 창조적인 사고와 문화의 전승기능을 함께 가졌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 만으로써도 족할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해방 후 수십 년 간 이른바「극렬 한글 논자」들의 미 망 때문에 웬만한 학교교육을 마친 자까지도, 자기 집 서재에 있는 수백·수천의 장서를 두고서도 이에 접근하려는 엄두를 못 내게 됐으며 국내도처에 있는 역사적 기념물 등의 편액·현판하나, 또는 매일매일 발간되는 신문지면하나 제대로 판독을 못하는 반 문맹자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다행히도 최근 수년 내 문교 당국은 이 같은 잘못을 깨닫고 중학교 교과과정에서의 한자교육을 재개한바 있으며, 또 일부 교과서에서의 한자병기를 단행한 것은 평가할만한 일이다. 우리의 국어 낱말 중 60%가 한자어라는 것과, 표의문자로서의 한자가 갖는 사고도구로서의 효율성, 그리고 국민학교 과정에서부터 대학까지의 3천자 정도의 기초한자교육이 결코 무리한 학습부담을 줄 수 없다는 사실 등을 고려할 때 각급 학교 교육과정에서의 한자교육 내지 한문교육의 재개는 우리에게 세계적 자랑이 될만한 언어문화를 갖게 해준 한글날의 의의를 기리는데 있어 그 문화적 의미를 다시 한 번 현대 문화사적 코텍스트에서 재음미케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각종 외래어와 비어·속어·은어 등의 범람으로 어지러워 질대로 어지러워진 우리의 국어생활을 순화하는 일도 당면한 급선무라는 것을 지적해두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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