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서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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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디플로머시」는 「그리스」어의 diploma에서 유래한 말이다.
원래는 『접는다』는 뜻이다. 이 말이 바뀌어 나중엔 문서의 사본을 의미하게 되었다. 영어에선 아직도 중요 공문서를 「디플로머시」라고 한다.
「문서」를 뜻하는 「디플로머시」가 「외교」라는 뜻으로 변형된 것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 「외교」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문서상의 약속』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의 증서에 의한 약속인 셈이다.
외교문서엔 여러 가지가 있다. 당사국 사이의 법적인 권리와 의무가 따르는 문서상의 합의중 최고의 구속력을 갖는 것은 「조약」(treaty)을 들 수 있다. 넓은 의미로 말하면 협약·협정·규약·헌장·교환공문·선언·규정·의정서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관계 상사국 사이엔 언어가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같은 조약을 놓고 갑론·을론이 있을 수 있다. 이런 혼란을 피하기 위해 조약은 정문(text)을 따로 정해두는 것이 관례이다. 그것은 당사국 사이의 합의에 따르나, 일반적으로는 영어·불어·「스페인」어 등 전통적인 국제어가 정문으로 채택된다.
최근엔 국가간의 정상외교가 빈번해지면서 「공동선언」을 자주 볼 수 있다. 역시 조약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이런 형식은 주로 장기조약의 성격을 띨 때가 많다. 국지전쟁의 종식을 고할 때 특히 영토분쟁을 끝낼 때 당사국은 이런 내용을 세계에 공동으로 선언한다. 영해상의 「라인」을 설정할 때도 그런 예를 볼 수 있다.
외교상의 복잡한 절차와 형식을 피하기 위한 간편한(?) 방식도 있다. 교환공문(exchange of notes)은 신속성을 필요로 할 때 같은 내용의 공문을 서로 교환, 확인하게 된다. 역시 외교적인 구속력을 갖는다.
의정서(protocol)라는 문서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속적 보충적인 문서로 기본조약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외교교섭·국제회의의 의사 또는 사실의 공식보고를 기록, 관계국은 서명을 해야한다. 구상서(note verbale)도 역시 상대국과의 토의사항을 기록한 외교문서의 하나이다. 3인칭으로 쓰이는 것을 보면 그만큼 구속력이 약하다. 흔한 경우는 「코뮤니케」(성명서)가 있다. 이것이 국가사이에 이루어지면 조약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흥미 있는 예는 「신사협정」·「토킹·페이퍼」(talking papers)·「메모랜덤」(각서)·「친서」등이 있다. 정직하게 말해 법률적인 이행의무보다는 도의적인 책임이 더 중시된다. 이들은 그 배경을 이루는 외교적 과정이나 절차에 의해 구속력을 쉽게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불성실한 이행을 서로 추궁하게 되면 다만 「도의적 책임」만을 운운하게 된다.
한·일 관계는 원래 64년의 『김·대평 메모』에서 통풍구를 찾았었다. JP(김총리)와 대평외상(당시)이 주고받은 「메모」. 최근에 벌어진 양국간 분규해결의 실마리도 역시 「친서」와 「토킹·페이퍼」에서 찾게 되었다. 친서는 일국의 원수가 타국의 원수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인데 정식 외교문서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외교상의 편의를 위해 활용된다. 「토킹·페이퍼」도 역시 같다.
이제 한·일 양국은 「도의적 책임과 의무」를 서로 확인하게 되었다. 남은 것은 신사도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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