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제도·통화기구의 변화가능성 진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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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법칙이 변하면 사회의 제도도 변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경제사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최근 세계 각국의 격심한 「인플레」물결에 휩쓸리자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경제사회는 커다란 「쇼크」를 받았다.
그리고 이것이 장기화할 전망을 보임에 따라 제도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적응 「시스팀」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다음에 소개할 「이코너미스트」지의 「리포트」는 이 가운데 화폐제도 및 통화기구의 변화가능성을 진단한 것이다. <편집자주>
연율 10∼20%의 물가 상승률은 몇 세기동안 지속되어 오던 금융질서를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연 3∼4%의 「인플레」를 전제로 성립되었던 화폐유통「시스팀」이 비록 양적인 변화라고는 하나 전혀 새로운 행동법칙에 급작스레 부닥친 이상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각종 은행과 보험회사, 연금기금, 증권거래소 등 거의 모든 금융기관이 자신의 적응한계를 벗어난 「인플레」현상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연 10%의 물가 상승률이라면 내구년한 70년인 1만 5천「파운드」짜리 집이 마지막 해에는 1천5백만「파운드」로 변하게 된다. 만약 20%씩 오른다면 무려 25억「파운드」로 될 것이다.
따라서 제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연부 상환조건으로 집을 살수는 없다. 「사우디아라비아」 의 대사라 한들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 5억「파운드」의 몇%를 내겠다는 조건으로 현 싯가 1만 5천「파운드」짜리 집을 살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지켜오던 자본주의사회 경제법칙이 변했다는 의미이다. 빌고 빌려주는 관계가 종래의 상식을 완전히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러다가 괜찮아지겠지』하는 낙관론을 펴기도 한다. 미친 듯한 「인플레」가 심각한 경기후퇴를 통해 치유되면 그 다음부터는 다시 『그리운 옛날』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 이와 같은 낙관론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설사 경기후퇴가 실업률을 높인다 해도 임금수준 자체가 떨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전투적인 노동조합이 임금인하를 방해하는 이상 불황이 「인플레」진압의 지렛대 구실을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자본주의경제가 과연 어떤 방향으로 적응할 것인가 이다.
자본주의사회의 경제현실에 접근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화폐라는 혈액 순환을 통해 「시스팀」전체를 보는 것이다.
흔히 화폐의 기능으로 지불수단·가치저장수단·가치척도의 세 가지를 꼽는 데 76년 이후에 현실화 될 「인플레」에 의한 변형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들 기능이 어떻게 변질되는가를 살펴보자.
첫째, 지불수단으로서의 기능은 절름발이가 될 것으로 보인다.
화폐의 가치가 시간이 지날수록(지분을 거듭할수록) 급속히 떨어져버리므로 돈을 비는 사람은 덕을 보고 빌려주는 사람은 멀쩡하게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특히 차용한 돈으로 땅이나 건물 등을 사둘 경우에는 명목이자와 실질 「인플레」의 차익을 가만히 앉아서 먹을 수 있다.
절름발이가 될 지불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방법으로서는 이른바 지수경제(인덱세이션)가 있다. 하지만 영국에서 이것을 채택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려울 것이다.
보수당 정부는 기껏 통화공급 억제로 견디려 할 테고 노동당 정부는 국유화라는 극약이나 먹으려 들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금융기관은 본연의 임무를 잃고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에 따라 통폐합되어 일찌기 경험하지 못했던 독점금융자본의 출현을 이룰 것이다.
둘째, 화폐의 가치저장수단으로서의 기능은 교과서에서 빼버려야 할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영국과 미국은 자본시장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기업금융의 70%가 주식 등 직접금융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이나 서독 등의 기업금융이 은행을 통한 간접금융인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한데 변형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이것이 큰 화근으로 된다. 「인플레」가 증권의 실질가치를 좀먹기 때문에 팔려는 사람은 있어도 사려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이를 회피하는 방법도 지수경제밖에 없으나 영국 은행이 촌보도 양보하지 않고 있다.
어쨌든 화폐가 가치저장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잃게되면 자본시장은 마비될 수밖에 없다. 그 피해는 자본시장이 잘 발달된 나라일수록 심해진다.
셋째, 가치의 척도라는 기능은 거의 형체조차도 남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1만 5천「파운드」가 70년 후 25억「파운드」로 부풀어오르는 「인플레」복리의 마술은 척도의 눈금이 구실을 못한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따라서 눈금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변할 것이라는 가정아래 구축된 현재의 금융제도는 이와 같은 급격한 환경변화에 자연사하고 말 것이다. <영 이코너미스트="본사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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