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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우수 어린 그 음성에 난 눈물이 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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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호 27면

이탈리아 테너 티토 스키파. 레퍼터리는 적었지만 특기인 레가토 창법이 탁월했다. 지난 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명가수다.

1960년대 초반 청계천 복개 이전에 부근의 허름한 식당에서 나는 국밥 한 그릇을 막 받아놓고 몇 숟갈을 뜨고 있었다. 허기를 달래려고 급히 식당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국밥을 반도 채 먹지 못하고 숟갈을 내려놓고 식당에서 나와야 했다. 식당 한쪽 벽에 높은 선반이 있고 그곳에 낡은 라디오 한 대가 있는데 내가 식사를 막 시작한 순간에 공교롭게 때맞춰 그 라디오에서 티토 스키파(Tito Schipa·1889~1965)가 부르는 마르티니의 ‘사랑의 기쁨’이 흘러나온 것이다. 노래를 듣는 순간 나는 목이 메어 더 이상 국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국밥 위로 눈물도 몇 방울 떨어졌던 걸로 기억한다. 사람들이 그런 내 모습을 볼까봐 더 이상 거기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밖으로 나와서 하염없이 청계천변 골목길을 걸었다.

리릭 테너의 전설 티토 스키파

이 비슷한 장면들이 젊은 시절 내게 몇 차례 더 있다. 그는 나를 자주 목이 메게 만들었다. 티토 스키파의 노래는 들을 기회도 많지 않았다. 그 이름은 비슷한 연대에 활약한 카루소나 질리, 약간 후배 격인 스테파노나 탈리아비니에 비하면 턱없이 알려지지 않았다. SP판으로 남겨진 카루소나 질리의 노래는 가끔 들을 수 있었지만 티토 스키파의 음반은 구경조차 못했다. 그때까지 나는 그의 노래를 딱 두 곡 들었는데 탱고곡인 ‘라 쿰 파르시타’와 앞서 쓴 마르티니의 노래였다. 60년대 초까지 종로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음악실 ‘르네상스’에 가면 이들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90년대 초반 강남의 음반 매장에 들렀다가 나는 보라색 바탕에 흑백 인물사진이 있는 음반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설마…? 그러나 틀림없는 티토 스키파의 2장 음반 세트였다. ‘추억의 앨범’이란 표제가 붙은 음반은 이탈리아에서 디지털로 재생시킨 신상품이었다. 너무나 반갑고 기뻤다. 그간 해외여행 가는 사람을 붙잡고 몇 차례나 티토 스키파 음반을 구해 달라고 간청했던가. 음반은 사치품으로 수입금지 품목이었다. 해외여행도 특수신분 아니면 꿈도 못 꾸던 시절이다. 아무도 내 간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뒷날 내가 여행을 직접 해본 결과 짧은 여행기간에 남을 위해 음반을 구해온다는 게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닌 걸 알게 되었다.

새 음반에는 ‘돈 조반니’ ‘리골레토’ ‘돈 파스콸레’ 등 티토 스키파가 출연했던 오페라의 주요 노래들이 망라되어 있다. 내가 선호하는 헨델의 ‘라르고’와 글룩의 ‘아아 나는 에우리디체를 잃었노라’도 있다. 30년을 기다려 티토 스키파의 모든 노래를 감상하는 감회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는 내게 다시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사람이 부르는 노래의 아름다움과 감동은 이런 거다’라고 그는 내게 가르쳐준 것이다.

티토 스키파의 목소리는 보통 미성이라고 평가되는 범주에는 들지 못한다. 미성으로 말하면 질리나 탈리아비니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 그의 소리는 약간 쉰 듯한, 미세한 허스키의 기미마저 보인다. 대지를 진동시킬 것 같은 카루소의 위풍도, 스테파노의 시원하고 매끈한 면모도 그에겐 없다. 리처드 터커나 존 매코맥처럼 남성적 힘을 보여주지도 못한다. 특히 저음은 너무 평범하고 소리가 작아 명성 높은 테너라는 호칭이 무색할 지경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약점에 그의 매력의 비결이 숨어 있다.

“나는 오케스트라와 경쟁하지 않는다.” 그가 한 말이다. 이 말은 작은 소리로도 얼마든지 음악적 표현력을 풍부하게 살려낼 수 있다는 자긍심의 표현이다. 그리고 약간 쉰 듯한 음성은 탄식의 노래에서 절묘한 효과를 드러낸다. ‘아아 나는 에우리디체를 잃었노라’에서 그의 쉰 목소리는 얼마나 절절하게 듣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가? 북미와 남미에서 많은 활동을 한 그는 이런 특징과 매력으로 크게 부를 쌓을 만큼 청중의 큰 호응과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리릭 테너의 전설로 기록되어 있다. 스키파를 소개하는 짧은 노트에는 그의 음색이 부드러움, 노스탤지어, 우수로 가득하다고 나와 있다.

70년대 후반 이탈리아 파르마 오페라단이 서울 공연을 왔을 때 주관 매체의 부탁으로 관심의 표적이던 바리톤 알도 프로티(Aldo Protti·1920~95)를 잠시 만난 일이 있었다. 사자의 목소리를 가졌다는 이 원로 가객의 표정이 처음에 너무 무뚝뚝하고 근엄해서 말문을 열기가 난처했는데 내가 티토 스키파의 광팬이라고 고백하자 그는 금방 활짝 웃는 얼굴이 되어 두툼한 손으로 다시 악수를 청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젊은 시절 그와 한 무대에 섰던 경험도 있다는 알도 프로티 역시 티토 스키파가 최고의 가수였다고 말했다. 졸지에 티토 스키파 동호인이 되는 바람에 그날 인터뷰는 아주 잘 진행될 수 있었다.

티토 스키파는 1928~43년 사이 여러 편의 음악영화에도 출연하고 작곡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오페레타와 적지 않은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활동은 그가 노래로 청중에게 선사한 감동의 부피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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