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연극 왜 드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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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상반기에 이미 10여 개의 창작극이 공연되었고 하반기에도 어느 해보다 많은 창작극 공연을 앞둔 연극계에는 요즘 「극작가의 현실에 대한 무감각」과 「평론가의 무성의」를 두고 극작가와 평론가사이에 논쟁이 일고있다. 지난 13일 『극 평가의 성실성』이라는 제목으로 평론가를 공박한 극작가 이근삼씨의 글에 대해 평론가 이태왕씨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보내왔다.<편집자주>
연극예술이 인간의 현실과 외면의 상황사이에 다리를 놓는 수단의 하나라고 믿는 이상 연극은 인간에게 현실감과 진실감을 획득하도록 도와줄 수 있고 그 현실 속에서의 인간의 의미를 발견하고 확인하고 수색하는데 도움을 주어야한다고 믿고 있다.
본질적으로 볼 때 인간성의 탐구와 현실의 발견으로서의 연극적 체험은 우리들에게 희망을 안겨다주는 「건설적 경험」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들의 내면과 외면의 현실사이에 부조화가 조성될 때 그것은 「파괴적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경험은 연극이 인간세계의 인식과 재현과 개조를 가능케 해주는 수단임을 자각할 때 그 중요성을 띠게 된다.
오늘의 현실은 살아서 맹렬히 움직이는데 살아있는 연극은 어째서 드문가. 살아있는 연극이 드물다는 것은 「피터·브루크」가 말한 대로 「살아있는 체험 위에 기반을 둔」연극이 드물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극작가에 관한 한 그것은 창의성이 없는 무감각한 작품·관객에의 도전이 없는 언어와 사상·현실을 보는 날카로운 눈이 없는 작품·예술가로서의 주장이 없는 작품이 무대 위에 남발될 때다. 금년도 상반기에 쏟아져 나온 언어의 홍수를 보라. 우리들의 북소리·우리들의 마음·우리들의 아우성·우리들의 피가 담겨져 있지 않은 그 언어는 결국 우리들의 언어가 아니다. 특히 우리들의 것이 되지 못한 그 언어는 우리와 우리의 시대를 위한 언어가 될 수도 없고 우리와 우리의 시대를 초월하는 영원한 언어로 빛날 수도 없다. 정직하지 못한 위선의 언어 속에 우리는 허위를 보고 분노한다.
우리들의 존재의 심연에 도달하지 못한 언어·우리들의 문제를 뼈아프게 재연하지 못하는 극작가들의 언어 속에 우리는 연극의 위기를 느낀다.
예를 들어 이근삼씨의 작품 『30일간의 야유회』의 인물인 소장의 대사에서 우리는 우의적 애매성 속에 몸을 숨긴 극작가의 중간적 입장을 본다. 풍자와 「아이러니」는 이 극작가의 지적인 무기이다.
이 무기를 잘 사용하지 못한 근본적 이유는 풍자와 「아이러니」의 정신인 비평의식은 그 본질상 중간적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닌데 극작가는 애매한 중간적 위치에서 현실을 부관하고 있다는 모순 때문이다.
작중 성격은 어떠한가. 개별적인 인물이 인형처럼 나열되어 있다. 산 인물이 서로 부딪쳐서 인간관계의 「다이내믹스」가 성격을 부각시키는, 그럼으로써 생기는 숭고한 인간의 「드라머」가 없다.
차범석 작 『약산의 진달래』의 경우에도 지극히 시사성이 강한 뻔한 주제에다 「위트」도 「아이러니」도 「유머」도 없는 대사에 한바탕 쓴웃음을 터뜨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현실은 어둡고 다급하기 때문에 보아도 좋고 안보아도 좋은 사소한 일상적 풍경 앞에서 우리는 공허한 웃음만을 터뜨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극적대사로서의 성격강조가 없는 그의 『활화산』·『꽃바람』도 현실을 보는 작가의 눈이, 현실을 해석하는 예술가의 눈이 아니었기 때문에 풍속극의 저질성을 면치 못하고 말았다.
한 작가의 눈은 한 시대의 눈이다. 그 눈이 빛을 잃고 그 작품이 경적의 소리를 잃었을 때 남는 것은 현실의 껍데기를 보는 권태감뿐이다.
오늘에 와서 우리는 극작가 이근삼씨 또는 차범석씨 등의 기성인들에 대해서 사실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 우리들이 그들의 작품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오로지 창작극 진흥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안고 새순처럼 돋아나는 젊고 참신한 신진 극작가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다.
젊은 미지의 극작가들에게 기성극작가들의 오류를 다시 범하거나 그들의 아류로 타락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함이며 새 작가들이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일을 격려하기 위해서다. 「사화산」이 되어 맥없이 뻗어 누운 그들은 현재 속에 살아있는 귀중한 전통이 아니고 우리들이 아낌없이 버리고 싶은 소산일 뿐이기에 젊은 극작가들의 미래의 불꽃을 우리는 암흑 속에서 기다리며 주시할 뿐이다.
「극평가의 성실성」을 강조한 이근삼씨의 소론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 논쟁이 지엽적인 것에 흐를 염려가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만을 언급했다. 단 한가지 「공연도 보지 않고 공연평을 쓰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을 밝혀둔다.
『예술만이 예술가의 유일한 「패스포트」』이다. 따라서 극평가의 본질적이고도 유일한 관심은 극작품에 국한된다.
반대로 극평가에 대한 극작가의 반론이 제기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작품 그 자체를 두고 논할 때만 그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태주 <숭전대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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