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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가슴보다 머리로 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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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50여 년 전의 일이다. 휴전 후에도 극심한 인플레는 계속됐다. 당시로서는 유능하다는 사람들을 경제참모로 뽑아 대응하고 있었지만 실적이 좋지 않아 이승만 대통령은 불만이었다. 한동안 혼자 물가걱정을 하던 그는 어느 날 무릎을 쳤다. 물가란 결국 돈을 많이 찍어내니까 오른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듣자 하니 이 사람들이 매일 몇 트럭씩 돈을 찍어 나른다는데 이것이 잘못이구나. 누구하고 상의할 것도 없이 대통령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헌병을 동원해 조폐공사의 인쇄기를 봉인해 버렸던 것이다.

돈이 넘쳐 나면 물가가 오른다는 논리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물가를 잡겠다고 돈을 못 찍게 하면 경제에 마비현상이 오고 사회적 혼란과 동요를 유발한다. 빈대 잡느라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깜짝 놀란 한은 총재가 뒤늦게 대통령을 면담해 이런 문제점과 함께 인플레는 다각적으로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점을 설득함으로써 인쇄기 봉인은 곧 해제됐지만 통화정책의 유명한 에피소드로 남게 됐다.

역사교과서와 독도 문제와 관련해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작성한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했을 때 많은 국민이 그 내용과 논리에는 공감을 표시했다. 그렇지만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으며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례를 생각하고 부작용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청와대 쪽에서는 그 글이 대통령 혼자 즉흥적으로 작성한 게 아니라 외교 관계부처 장관 및 청와대 참모진과 다섯 차례의 회의를 거친 산물이라고 해명에 나섰지만 첫 회의 때부터 대통령이 손수 메모를 준비해 왔고 거기에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면 장관들이 이의를 달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일 양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각각 하고 싶은 말을 여과 없이 내뱉고 국민이 이에 동조해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되면 두 나라 사이의 경제와 문화 교류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더욱 깊게 파인 감정의 골은 동북 아시아지역의 장기적 발전에 큰 장애물이 될 것이다.

그저께 일본의 교과서 검정 결과가 발표됨으로써 그간의 감정적 대립이 증폭될 위험도 없지 않지만 이제부터는 문제의 확대보다 수습에 나서야 할 때라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나라의 정치가와 시민단체보다는 양식 있는 학자.전문가.언론이 나서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양국 정치 지도자들은 발언을 자제하고 이들 전문가집단의 의견을 경청한 뒤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 문제를 연구할 때 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삼는 문구가 '냉정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이다. 논리와 감정의 균형을 잘 잡으라는 뜻이다. 헝클어진 외교 문제도 이런 방식으로 풀어가야 한다. 지금까지는 뜨거운 가슴과 고함소리가 판세를 지배해 왔지만 이제부터는 머리를 앞세워 국익을 냉철하게 따져가며 다각적으로 대응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미국의 칼럼니스트 앤 랜더스가 남긴 충고를 되새겨 보면 어떨까 싶다. 상대방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나 모욕적인 언동에 격분하는 독자들을 그녀는 이렇게 달랬다. "몸으로 싸우러 나서기 이전에 우선 그 못된 상대방에게 편지를 쓰세요. 그런 다음 그 편지를 바로 부치지 말고 하루를 묵힌 다음 다시 꺼내 읽어 보세요." 그녀에 의하면 대부분의 독자는 다음날 편지를 다시 읽고는 자신이 감정적으로 격앙돼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찢어버렸다고 한다.

노성태 명지대 경영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