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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아산만에 강철불꽃이 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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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6면

'IMF 불러들인 부실기업' 세상의 온갖 비난 속에 3090명 이던 직원은 6년새 646명으로 줄었다. 뼈아픈 구조조정 끝 작년 이익 693억 작은 기적을 만들고 있다.

서울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 한 시간여를 달리면 길이 7.3㎞의 서해대교를 만난다. 다리 건너편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충남 아산만 해안선을 따라 휴스틸.동부제강 등 철강업체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길을 따라 7㎞를 더 달리면 한보철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1991년부터 5조원을 쏟아 부어 바다를 메운 부지에 공장을 지었다가 1997년 부도를 내면서 '외환위기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얻었던 한보철강. 이제는 막 만들어진 철근을 실어 나르는 20t 운반트럭이 연신 정문을 드나들고 있다.

근로자 모임인 한가족협의회 이성만 대표는 "과거를 털고 날아오를 준비가 끝났다"고 말했다. 서해대교 만큼이나 길었던 6년 세월이었다.

◆봄 바람부는 현장=지난 17일 뜨거운 쇳물이 뿜어내는 열기로 후끈한 봉강(棒鋼)공장에서 만난 서정택(36)씨는 "부도 후 고락을 함께했던 열연공장 동료 6백여명을 1999 ~ 2000년에 떠나보내야 했던 아픈 기억이 생생하다"며 "하반기부터 이들이 다시 돌아오면 똘똘 뭉쳐 'IMF의 원흉'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벗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보철강은 부도이후 3천90명이던 직원을 6백46명까지 줄였다. 6년여 동안 월급도 전혀 오르지 않았다. 부도 당시 3백개가 넘던 협력업체 중 도산한 업체만 1백곳을 넘는다. 가혹한 구조조정의 여파였다.

한보철강 공장은 크게 A지구와 B지구로 나뉜다. A지구에는 철근을 생산하는 봉강공장 외에 열연강판(핫코일)을 생산하는 열연공장이 있다. 봉강공장은 가동 중이지만 열연공장은 1998년부터 생산이 중단된 상태다. B지구는 고철을 녹여 열연강판을 만든 뒤 이것을 재료로 냉연제품까지 생산하는 종합제철 공장을 건설하던 중 부도로 인해 공사가 전면 중단됐다.

지난해 한보철강은 1백15만t의 철근을 생산해 4천3백99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한보철강 김창규 총무부장은 "지난해 부실 자산에 대한 감가상각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6백93억원의 이익을 올렸을 만큼 현재 경영상태는 안정적"이라며 "연 생산량 1백80만t인 열연공장을 재가동하고 B지구 설비중 현재 공정률이 94%인 냉연공장(연 생산량 2백만t)만 조기 완공하면 포스코에 이어 업계 2위로 도약하는 것이 꿈만은 아니다"고 밝혔다.

◆대금 납입 문제없나=지난달 12일 한보철강 인수 본계약을 체결한 AK캐피털 경영진은 지난주 서울 신라호텔에서 국내 투자자를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었다. 오는 7월까지 내야 할 잔금 4천억원 등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AK캐피털 회장인 권호성 중후산업 사장은 그러나 "돈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국내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AK캐피털의 자금 부문을 담당하는 CLSA증권 로버트 한카 고문은 "해외 투자자로부터 2억5천만~3억5천만달러를 투자하겠다는 확답을 받은 데다 해외 금융기관에서 2억5천만달러를 차입해 이미 납입대금과 운전자금 마련을 끝냈다"며 "이번 설명회는 한국 투자자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는 권회장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 9월 홍콩에서 36곳의 기관투자자를 상대로 설명회를 벌였으며 그 가운데 22개 기관에서 투자를 문서 또는 구두로 확약했다고 덧붙였다.

AK캐피털은 A지구 주식의 50%, B지구의 30% 정도를 한국 투자자에게 매각해 약 2억달러를 유치할 예정이다. 권회장은 "총 7억5천만달러 규모의 현금을 확보해 3억7천7백만달러의 인수대금을 납부하고도 A지구 열연공장을 재가동하고 B지구 냉연공장을 완공하는 데 문제가 없다"며 "3년 내 투자자들에게 연 평균 25%의 투자수익을 돌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쟁력은 있다=현재 세계 철강시장은 좋지 않다. 공급과잉에다 미국의 보호무역여파로 자국내에 안정적인 수요가 없는 철강회사들은 경영이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한보의 주요 생산품인 철근의 경우 현재 공급이 달리는 상황이다. 또 곧 생산에 나설 예정인 핫코일은 지난해 5백만t을 수입해야 했다. 한보만을 놓고 보면 시장 전망은 밝다는 것이 AK 측의 설명이다.

가격경쟁력도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철강 부문에서 손꼽히는 분석가인 브래드포드 리서치의 찰스 브래드포드 사장은 "자산인수 방식으로 한보철강을 사들였기 때문에 새로 출범할 법인은 재무상태가 깨끗해 금융비용이 국내외 경쟁사보다 적은 것이 가장 큰 강점"이라며 "사들인 가격도 새로 철강공장을 지을 때보다 훨씬 낮아 감각상각의 부담이 적기 때문에 다른 회사와 비슷한 수준의 영업이익만 내도 훨씬 많은 순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남아 있는 문제는 없나=외국 자본이 새 주인으로 들어오는 데 대한 반감이나 노사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낮다. 한보철강 신승주 차장은 "급여.복지수준이 저하되지 않는 조건으로 새 법인의 재고용 요청에 응하는 직원은 전원 고용하기로 합의한 상태"라며 "오히려 열연.냉연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퇴직 직원을 우선으로 1천여명을 고용해야 하기 때문에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새 경영진도 재고용에 호의적이다. 최고운영책임자(COO) 로 내정된 존 실은 "자산실사 과정에서 전기로에 가스버너를 설치하는 아이디어를 냈더니 1년 만에 이를 실용화해 1백만t이던 생산능력을 1백20만t까지 끌어올리더라"며 "직원들의 교육 수준과 능력이 뛰어난 데다 열의도 높은 것을 보고 놀라고 감명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넘어야 할 장애물도 적지 않다. AK캐피털은 업계 최고 수준의 대우를 약속하는 한편 B지구의 모든 시설을 완공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서는 계약잔액 기준으로 1조3천억원, 공사 중단에 따른 손상과 물가.환율 상승 등을 고려하면 최대 1조8천억원의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이 철강업계의 추산이다. 권회장은 "수익성이 높은 공장부터 하나씩 문을 열면 된다"고 밝혔으나 세계 경제 침체나 원자재 가격 급등 등의 돌발변수를 만날 경우 낙관할 수 만은 없는 상황이다.

김창우 기자
사진=장문기 기자<c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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