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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문화 심포지엄(7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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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조국이 광복된지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세월이 여시라더니 멀지않아 일제치하의 36년과 맞먹는 분단의 기간이 흘러갈 것만 같다. 광복이란 나라를 빼앗긴 민족에게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단어였다. 광복단·광복군·광복절 등 조국을 빛나게 회복하기 위하여 독립운동을 하며 독립투쟁을 하다 45년8월15일 광복을 맞았다. 49년 대통령령124호로 45년 일제에서 해방되어 조국을 광복하게된 날을 축하하기 이하여 8월15일을 광복절로 제정한지도 오래되었지만 조국분단의 현실은 아직도 완전한 광복을 이룩하지 못한 채 진정한 광복을 바라고 있는 안타까운 심정.
광복이란 정치학적·국가학적개념에서는 주권회복이나 국권회복이라고 하겠는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통일이 되지 못하여 반신불수의 광복으로 되고 말았다. 38선·휴전선이란 사슬에 묶여 제대로 운신하지 못한 채 민족통일을 여원하고 있는 이 민족에게 현실은 국치의 그때를 회상하게 하고 있다. 동 아시아의 강대국인 소련·중국·일본의 3국 속에 포위돼 있는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세계 열강의 힘의 지배 속에 타율적으로 요리되는 슬픈 운명을 지니고 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대한제국은 열강의 각수 속에서 처음에는 소국으로써 독립을 보전하려고 하였지만 사불여의하자 서로 자파의 이익을 위하여 외세를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열강의 각수장이 되더니 1910년에는 일본에 강제병합 당하여 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국권을 상실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첫째로는 자주적 근대화를 이룩할 만한 사회·경제적 자주역량이 없었고 둘째로는 지도층의 육성이 미흡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망국도 불란한 사대>
일본의 명치유신과 비교해 볼 때 한국의 국제환경은 일본보다 별로 못하지 않았는데도 국권을 상실한 것은 지도층의 몰지각 때문이었다.
자파의 당리·당략을 위하여서는 나라가 망하건 말건 외세를 끌어들여서라도 승리를 거두어야 하겠다는 추잡한 집념이 망국의 주원인이 아니었던가한다.
우리가 광복되었던 원인도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선열들의 광복운동을 높이 허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일진회 등 친일파의 발호로 나라가 망한 뒤 조국을 광복해야겠다는 민중의 집념은 요원의 불길과 같이 의병운동으로 일어났다.
의병운동은 근대화된 일본제국주의자에 의하여 말살되있으나 비무장시위운동이었던 3·1운동은 일제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 장거였다. 3·1운동의 결과 1919년4월에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정하였다.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의 모범이 되었던 것으로 우리의 독립정신을 만세계에 천명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비록 무력항쟁면에서는 미미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국내외에 전파하고 주권을 임시관리한 중요한 기구로 대한민국의 법통을 계승한 망명정부라 하겠다.
상해임시정부의 활동과 구미위원부의 활동은 우리의 독립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40년8월18일에는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을 편성하고 대일 참전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고 41년12월11일에는 중경에서 대일 선전을 포고했고 민주주의국가연합전선에 참가하는 통고문을 미·영·소·중 4개국에 보내었다.
이러한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노력이 장개석 총통에 의하여 카이로 회담에 전달되었고 카이로에 모인 3거두는 일본 식민지로 있는 한국의 고충을 이해하고 적당한 과정을 밟아 자유 독립하게될 것이라고 공약하였던 것이다. 이 카이로 선언은 포츠담 선언에도 계승되어 한국의 자유와 독립은 세계에 재 확약되었던 것이다. 한국광복군이 조국해방을 위한 국내 침공을 벼르고 있던 사이에 이본이 45년8월15일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우리의 주권은 회복되었으나 자율적인 투쟁에 의하지 않고 외국이 힘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해방이 부여되어지고 말았다.
악몽의 38도선은 미·소의 일군무장해제 선으로 확정된 것이나 역사적의의도 없지 않았다. 1896년에도 일본은 「러시아」에 대하여 한반도를 38도선 근처에서 남북으로 분할점령하자는 안을 제시한바 있었다. 「러시아」의 로마노프는 이를 일단 거부했었으나 그 뒤에도 한반도의 분할 안은 심심치 않게 대두되었었다. 1945년의 38선 분단은 소련군의 계속 남진을 막기 위한 조치로 8월28일에야 확정되었다. 38선을 경계로 이북에는 소련군이 일군의 무장을 해제하게 되었고 이남에서는 미군이 일군의 무장을 해제하게 되었었다. 그 뒤 이 무장해제 선은 냉전의 전선으로 고정화되기에 이르렀다.
38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소련화에 급급하였고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군정의 기본정책 없이 갈팡질팡하는 인상이 짙었다. 상해임시정부를 가장 아껴준 장개석 총통은 국공연합전선의 붕양와 내전으로 한국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상해임시정부의 정통성 유지는 어렵게만 되었다. 11월23일 상해임시정부는 환국하였지만 망명정부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개인자격으로 돌아오기에 이르렀다.

<건국주도 세력 없어>
국내에 거주한 독립투사들은 정보를 얻지 못하여 일본패전을 미리 알지 못하였고 일본인에 의하여 정권이양교섭을 받고서 비로소 해방을 알게끔 되었다. 그동안 국내에는 정치적 지도세력의 형성이 없었으며 대부분이 일제하에서 식민지 생활에 적응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독립후의 건국주도 세력이 미약하였다.
일제에서 해방된 한국에 지도설이 빈약했던 것은 일제의 교육의 소산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교육은 식민지 공무원 양성에만 치중했고 민족지도자육성을 소홀히 하였었다. 그 결과 민족지도자간에는 단결력이 없었고 상호간 질서·질투하고 세력확장을 위한 암투만 계속됐다. 해방 후에 있었던 민족지도자들의 암살 등은 지도세력을 약화시킨 민족적 비극이었다.
해방 후 우리민족이 통일·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던 주오 이유는 냉전체제에 따른 국제긴장이었지만 우리 민족에게 민족운동의 구심단체가 있었거나 민족통합의 지도자가 있었던들 현재와 같은 분열은 극복되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크다.
미·영·불·소 4대국이 점령한 오스트리아가 통일된 것은 망명정부의 정통성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며 지도세력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으로서는 물론 일단 얻은 영역을 공산화하려고 발버둥쳤지만 소련에 아부하는 세력이 없는 곳에서의 공산화는 성공하지 못했던 것을 보더라도 민족세력의 구심점이 없었음이 한탄 스럽다.
45년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대국 외상회의는 통일 한국정부수립에 있어서 종래의 난관을 제거할 것으로 생각되는 절차에 따라서 통일한국임시정부수립을 위한 협정을 맺었는데 중국도 나중에 이 협정에 가입하였다. 이에 따라 미·소 공동위원회가 구성되었었는데 이 공동위원회는 통일한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한국의 완전독립을 목적으로한 미·소·영·중 4개국의 5개 연간 신탁통치협정을 작성하도록 위임받고 있었다. 이 신탁통치 안에 대하여 한국민은 반대하였고 공산당은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랄 이에 찬성하였다.

<통일 장애된 6·25>
우익진영은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이승만 박사와 중국망명에서 돌아온 김구씨를 영수로 추대하고 단결했었으나 이 양 지도자는 서로 긴밀히 연합하여 정치운동을 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통합은 더 어려워졌다. 모스크바 협정의 테두리 안엣 소련과 직접 교섭하는 것이 무용하다고 생각한 미국은 47년9월17일 한국의 독립에 관한 모든 문제를 국제연합 제2차 정기총회에 제의하였다. 47년11월4일 유엔 총회는 한국독립의 절차를 규정하는 미국결의안을 압도적 다수로 가결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서 유엔 임시 한국위원단이 성립되고 48년1월12일부터 회의를 하게 되었다. 유엔 임시위원단은 입북을 거절당하여 유엔 소총회에 협의하였다. 유엔 소총회는 임시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할 것을 의결하게 되었다.
48년5월10일에는 38선 이남에서만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가 행해졌으며 5월30일에 국회가 소집되었다. 국회는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고 요법제정작업에 착수하였다.
제헌국회는 6월12일 북한동포가 국회에 보낼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하여 자유선거를 실시하고 동대의원들이 독립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하여 남한대의원과 합류하기를 호소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국회는 7월12일에 헌법을 통과시켰고 7월17일에 공포 시행하였나. 7월20일에는 이승만 박사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이 대통령 조각을 하여 8월15일에는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을 세계 만방에 공포하게 되었다. 이 정부는 실로 경술국치 후 39년만에 가진 우리의 정부였다. 다만 영토는 헌법상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되어 있으나 38선 이북에는 실제로 그 효력을 미치지 않음으로써 반신불수의 광복 주권회복이 되고 말아 서운함이 앞섰다.
반신불수의 불완전광복 상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통일방안이 제시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무력에 의한 실지회복 즉 무력통일을 주장하였고 현실주의자들은 평화통일을 주장하였다. 무력통일의 기도는 북한괴뢰정권에 의하여 시도되었다. 1950년6월25일 북한 인민군은 38선을 넘어 한국에 대한 전면공격을 가하여 국토를 초토화하였다. 6·25공산남침은 냉전의 소산으로 대리전쟁이며 공산주의자의 무력통일의 시도였고 폭력혁명의 모험이었다.
이 도발은 민족간에 열전을 전개함으로써 민족통일에 대한 치명적인 장애 요소로 등장했고 민족간에 씻을래야 씻을 수 없는 구거를 파 놓은 것으로 6·25남침의 원흉이야말로 민족반역자로서 규탄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6·25전쟁은 무력통일의 불가능성·허무성을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따라서 통일은 평화통일만이 가능하게 되었다. 맨스필드 미 상원의원은 60년10월 『미국은 오스트리아형의 중립화에 기준해서 한국통일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극히 신중히 고려치 않으면 안된다』고 함으로써 오스트리아 식 통일론이 연구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변경가능성은 탈냉전시대의 소산이었다고 하겠다. 이제 한반도에서의 긴장 대문에 전쟁에 말려들기를 원하는 강대국은 없어졌다.
이에 남북한은 남북적십자회담을 통한 이산가족찾기운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72년7월4일에는 역사적인 7·4공동성명이 발표되게 되었다. 7·4공동성명은 국제정세의 해빙 무드 속에서 민족자결적 평화통일을 주장하게 되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7·4성명의 제1조는 조국통일 원칙에 관해 자주통일·평화통정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기로 합의했는데 이는 민족통일을 위한 대 이상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7·4성명의 대 원칙도 이제 휴지화될, 위험성이 나타나고 있다. 상호간 중상비방금지의 원칙이 깨어진지 이미 오래며 남북조절위원회의 기능조차 정지상태에 있다. 이러한 사태는 북괴의 호전성과 7·4성명위반으로 초래된 것이다. 북괴는 남북회담 이후에도 도발을 그치지 않고 있어 평화통일에의 희망마저 무산케 하고 있다. 북괴가 아직도 8개항 통일방안을 주장하면서 ⓛ주한미군의 철수 ②남북한군대의 감축 ③한·미 방위조약의 폐기, 한·일 기본조약의 폐기 등을 주장하고 연방제운운하고 있는 것은 미군철수 후의 힘의 공백기를 틈타 무력적화통일의 야욕을 달성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보겠다.

<현상고정화 불가능>
우리 정부는 북괴의 통일전략의 허구성을 맹박하고 6·23선언으로 유엔 동시가입을 주장했고 74년 초에는 남북한 불가침협정을 제외하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현실적이며 실현가능성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으나 북괴는 아직도 주한미군철수 등을 주장하고 4대 군사노선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같이 북괴가 주한미군의 절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미군이 철수하는 경우 재남침으로 무력통일을 달성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며 이를 볼 때 현상고정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한 미군의 감축 내지는 철수문제는 국제긴장완화에 따른 시간문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우리의 통일문제를 타율적으로 결정하지 않도록 자율성을 발휘하여야 할 것이다.
통일의 방법은 평화통일이요, 승공통일의 길밖에 없다. 공산주의를 막아 이기고 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우리의 평균생활 수준을 북괴의 생활수준보다 몇 배나 능가시켜야 하며 사회적 소외의식이나 계층의식이 없어지고 국민총화를 이룩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요, 남북교류로 상호간 왕래가 많아져 미국과 캐나다처럼 동질화되는 경우에야 통일이 가능할 것이다.
이제 국제정세가 우리의 통일을 위하여 호전되고 있으므로 우리 민족은 이 기회를 잘 포착하여 평화통일을 이루어야만 하겠다. 통일만 되면 22만평방㎞에 5천만명의 인구를 갖는 우리나라는 세계 몇째의 경제국가로도 성장될 수 있는 것이다. 1천년 이상의 신라시대와 고려·이조까지 합치면 2천년의 통일국가를 형성했던 우리민족이 분단되어 있다는 것은 민족감정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통일독립을 위한 새로운 적극적 가치이념의 정립이 또한 시급한 과제이기도 하다.
조국의 통일이야말로 진정한 조국의 광복임을 우리는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대표집필>-김철수

<참가자>
윤세창<고대법경대학장·행정법>
차기벽<성균관대 교수·정치학>
김상준<서강대 교수·국제정치학>
이기택<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
김철수<서울대법대 교수·헌법>
주제 조국광복
일시 1974년8월9일 하오2시
장소 중앙일보사 회의실
사진 오른쪽으로부터 차기벽 김상준 윤세창 김철수 이기택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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