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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제자=김홍일|김성주의 기반구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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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로마넨코」사령부가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위장한 이후 소련군은 김성주를 앞세운 공산정권을 수립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소군 장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김성주를 「카렌스키·워」라고 추켜세웠는데 이 말은 「한인 제1인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당시 북한에서는 김책이 제1의 실력자였다.
김성주가 소련에서 낙하산훈련·철도폭파법·살인술 등 주로 첩보훈련을 받은데 비해 김책은 정치간부로 활동했었다.
46년8월 인민군창설작업에 참여했던 방원철씨(55·용산구 거주·예비역대령)는 김성주와 김책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최용건엔 형님 대접>
『소련당국은 김성주가 제출하는 안건에 대해 일단 김책과 협의해서 결정했고 김책이 제출하는 안건은 반드시 채택되었다. 단 하나의 예외는 인민군복장에 관한 것이었다. 김성주가 인민군의 복장을 소군 것과 비슷하게 고안하여 김책의 결재를 받아 제안했으나 소련당국은 독자적인 것을 만들어오라고 퇴짜를 놓았다.
김책은 김일성에게「일성 동지, 어떻게 된 거요」라는 식으로 말했고 김성주는 「김책 동지, 이렇게 합시다」라고 존대 말을 썼다. 나이는 김책이 열살 가량 위였다.
한편 초기의 김성주·최용건 관계에 대해 조진석 박사(73·중구거주·의사)는 『최는 김성주를 「김 장군」이라 불렀고 김은 최에게 「형님」으로 대접했다』고, 말했다.
조 박사는 최용건의 오산중학 1년 선배였고 김성주와는 그의 맹장염을 진찰할 만큼 가까이 지낸 사이였다.
최와 김은 북한에 들어와서 처음엔 기반이 너무 없어 어떤 사람이든 인연만 닿으면 접근했다고 조 박사는 회고했다.
최는 오산중학동창들을 끌어들이려 했고 김은 잠시 다녔던 창덕보통학교 때 친구들을 찾았다는 것이다.
김성주는 연고자들을 열심히 접촉하는 한편 그를 「김일성 장군」으로 위장시켜준 「로마넨코」사령부를 부지런히 들락거렸다.
남의 이름과 경력을 도용한 김성주는 「러시아」말을 잘할 줄 알면서 못하는 채 하는데도 능란했다.
김의 둘째 외삼촌에 강용석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생질이 소련사람과 얘기할 때 통역을 두는 것을 보고 『자네는 소련에서 몇 해나 있었으면서도 「러시아」말을 모르느냐』고 물었다고 이에 대해 김은 『삼촌, 내가 「러시아」말을 못할 리가 있습니까. 통역을 중간에 두어야 생각할 시간을 가져 실수를 안하기 때문이지요』라고 말했다고 강의 친구인 이봉철씨(74·동대문구 거주)가 전했다.

<소군, 10개 아지트 제공>
「로마넨코」는 김성주에게 소위 「김일성1호 집」으로부터 「10호」까지 10개의 「아지트」를 만들어 주었다.
평남도지사 사택이었던 「4호 집」은 접대소로 썼고 근처의 복도란 일본인 집이 「5호」로서 살림집이었다. 이 밖의 집들은 출입자가 정해진 각종 공작「아지트」였다.
「5호」살림집에서는 처 김정숙, 두 아들과 같이 살았고 46년10월께부터 동생 김영주 등이 같이 지냈다.
김정숙은 1919년 함북회령 태생으로 키가 작고 얼굴에 주근깨가 많으며 낮은 코에 입이 큰 모습이었다. 그녀는 어려서 용정부근의 「세상봉」이란 작은 물레방아 골에 이주했다가 다시 연길현에 가서 살았으며 소녀 때 공산유격대에 납치되어 산속을 따라다니다가(해방 후 회령부근에 퍼졌던 소문)1939년 김성주와 짝이 지어졌다. 그녀는 49년 임신해서 출산이 가까워졌을 무렵 「전치태반」으로 죽었다고 장기려 박사(64·부산복음병원장)가 말했다.
김성주 부부가 짝을 지은 39년은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반제구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그의 처 김혜순과 산 속을 헤매던 해이다(41회 참조). 김성주 부부와 제2방면군장 김일성 부처가 완전히 다른 사람임이 여기에서도 입증된다.
김성주가 정말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라면 이 때의 중상으로 몸에 흉터가 있어야한다.
그러나 48년 김성주가 급성맹장염에 걸렸을 때 진찰을 했고 소련군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때 입회했던 조진석 박사에 의하면 김의 몸에는 흉터하나 없다는 것이다.
김성주·김정숙 부부 사이에는 소련서 데리고 온 「유라」와 「스라」라는 당시 4세·2세 가량의 남자아이가 있었으나 둘째 아들은 46∼47년께 집 마당의 연못에 빠져 죽었다.
다시 김책에 관한 얘기로 돌아가서 그의 행적을 잠시 더듬어보겠다. 김책은 김성주의 권력을 굳혀주는 기초작업에 절대적인 공로를 세웠다.
45년 가을 김책은 진남포학원을 설립, 비밀조직공작요원을 양성했다. 무식하고 가난한 청년들을 모아 3개월간 교육시켜 군관복장 비슷한 제복을 입혀 각지에 내보내 소련파중심으로 당 조직을 시켰다. 이 같은 조직요원이 수 천명에 이르렀다.
김책이 그 다음으로 착수한 것이 46년8월의 인민군창설 작업이었다.

<고위층도 백여명 숙청>
인민군을 창설한 후에 김책은 제1부수상 겸 산업상이 되어 민수및 군수물자의 생산과 축적을 맡았다. 「6·25」를 내다본 물자준비를 김책이 맡게된 소이가 여기에 있다. 이런 준비를 끝낸 후 김책은 군복으로 갈아입고 전방지휘총사령관이 되어「6·25」남침의 선두에 섰다가 51년 중부전선에서 그는 폭사하고 말았다.
「모스크바」의 비호아래 권력을 잡은 김성주가 30년 가까이 요지부동의 권좌를 지킨 것은 무자비한 숙청을 수단으로 삼은데 있다. 그에 의해 숙청된 사람은 최저 90만명을 헤아리며 일반인 수백만명이 정치범으로 추방되거나 감시를 받고있다.
해방 후부터 지난 67년까지 숙청된 고관만도 근 1백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숙청된 주요인물은
현준혁 조만식 이용 이영 무정 김열 박광희 월진성 박헌영 이승화 이강국 임화 이주상 김순남 이태준 주영하 박일우 허가이 이원조 장시우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김승화 박의완 김강 이상조 기석복 정율 한빈 이권무 김을규 장평산 방호산 유영준 김원봉 김두봉 오기섭 허성택 이병남 현칠종 김달현 성주식 강태무 표무원 한설야 김창만 이일경 박금철 이효순 허석선 고혁 김도만 <이상 숙청연대순> 【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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