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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조윤선·윤병세 … 일본 한 방 먹인 소프트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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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불가리아 국적의 이리나 보코바(62)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2~4일 한국을 찾았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설립 6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기간 정부는 유네스코 수장을 상대로 일본을 향한 삼각압박 외교를 펼쳤다. 유네스코를 무대로 우리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일본에 ‘부드럽지만 아픈 펀치’를 날리는 것이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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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장관 “위안부 피해 기록 등재해야”

 시작은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이었다. 지난달 27일 프랑스 파리를 방문해 보코바 총장을 만났던 조 장관은 이번 만남에서 위안부 피해 기록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문제를 화두로 꺼냈다. 그는 미국 의회가 일본의 사과를 촉구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일 등을 소개하면서 위안부 문제가 특정국 사이의 분쟁이 아니라 ‘전시에 여성과 아동을 상대로 저지른 성폭력’임을 강조했다.

 보코바 총장은 “언론에 보도된 것 외에는 잘 몰랐다”며 다소 놀라는 눈치였다. 조 장관은 이때 나치 독일 치하에서 탄압받았던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 얘기를 꺼냈다. “2차 대전 때 홀로코스트 참상을 널리 알린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지 않았습니까. 위안부 피해 기록이 등재돼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에 보코바 총장은 “관심있게 지켜볼 테니 향후 진전사항이 있으면 즉각 알려달라”고 화답했다. 조 장관은 우리나라 전통 문양이 새겨진 스카프를 선물하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조 장관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만난 주요 인사들에겐 같은 선물을 해왔다. 이른바 ‘스카프 외교’다.

해녀 한·일전 … 대통령 “제주 해녀 관심을”

보코바

 4일엔 박근혜 대통령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날 청와대를 예방한 보코바 총장을 접견한 박 대통령은 ‘제주 해녀’를 언급했다. “한국의 김장 문화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기쁘다. 제주 해녀, 풍물놀이 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도 관심을 가져달라”면서다.

 한국은 2007년부터 제주 해녀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이 지난해부터 일본의 해녀인 ‘아마’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밀기 시작했다. 양국 모두 3월 중 유네스코에 신청서를 낼 예정이다. ‘해녀 한·일전’이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직접 제주 해녀 홍보에 나선 셈이다. 보코바 총장은 이것저것 보충 질문을 하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삼각외교의 마지막 축이었다. 같은 날 오후 보코바 총장을 접견한 윤 장관은 단도직입적으로 규슈·야마구치 근대 산업유산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일본의 시도를 비판했다. 이 지역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징용된 조선인 수천 명이 노동착취를 당하고 숨졌다.

윤 장관 “일제 징용시설 등재는 안 돼”

 윤 장관은 “우리 국민의 아픈 역사가 서린 곳을 세계유산에 올리려는 것은 세계유산 등재의 기본 정신에 반하는 것”이라며 관심과 지원을 당부했다. 공식 접견에서 제3국을 직접 언급한 것은 외교 관례상 이례적이다.

 보코바 총장은 이에 “세계유산 등재는 관련국을 분열과 갈등이 아닌 통합으로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일본의 시도가 갈등을 촉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묻어나는 답변이었다.

 정부의 이런 압박외교는 다변화하는 국제 환경에서 요구되는 ‘소프트 외교’의 일환이다. 군사력, 경제 제재 등 하드파워와 대비되는 소프트파워는 국가 이미지 제고, 교육·문화 콘텐트 등을 통해 상대방의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힘을 의미한다. 소프트파워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유네스코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게 정부의 목표다.

 마침 보코바 총장이 박 대통령, 윤 장관을 만날 무렵 일본이 가미카제 특공대의 유서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신청하기로 해 국내외적으로 비판이 일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박 대통령과 윤 장관 모두 보코바 총장 앞에서 ‘전쟁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평화의 방벽도 인간의 마음에 세워야 한다’는 유네스코 헌장 서문을 언급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유산 등재 등은 해당 위원회 소관이지 보코바 총장은 결정권이 없다”며 “그런데도 공식석상에서 이 문제를 논의한 것은 국제사회의 여론을 환기하고 일본의 잘못된 시도에 단호한 경고를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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