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9)<제자 이치벽>|<제38화>약사창업(10)|이치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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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897년부터 오늘날까지 77년간을 내려오는 동화약방의 활명수엔 창업자 민립 호로부터 민단→민인 복으로 이어지는 민씨3대의 영고성쇠가 어려 있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께 민립 호로 부 터 민단이 동화를 이어받았을 당시만 해도 활명수는 아직 존재가 없는 신개발 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민단은 이 활명수를 어떻게 하든 대중화시키기 위해 몇 병을 사면 덤(할증)을 주는 등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도대체 보급이 신통치 않았다. 그 때만 해도 보수적인 경향이 뿌리깊이 새 물건을 여간해서는 신용하려 들지 않을 때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민단이 머리를 써 생각해 낸 판촉 책이 바로 『예수쟁이(그 때는 그렇게 불렀다)가되자』는 것이었다.
남선은 완고해서 도저히 파고들 여지가 없지만 서북 선은 기독교가 일찍부터 들어와 신 문물을 한참 받아들이고 있으니 기독교만 믿으면 교인들이 모두 써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일단 작정한 민단은 약방에서 가까운 정동교회를 부지런히 나가며 안 믿던 예수를 믿고 교회에는 머릿돌을 기증하는 동교 인수 업(?)에 열을 올렸다. 그러길 수년,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서북선 기독교인 사이에 활명수선전이 저절로 되면서 서로들 같은 교우 것이라고 써 주기 시작했다. 「기독교인화 작전」이 서북선을 완전히 먹은 것이었으며 그 뒤 남 선에서의 순조로운 보급도 이 여세에 힘입은 것이었다.
언젠가 그의 아들 민인복씨(59·서대문구 냉천동74의45·한국「칼라」동우회간사)로부터 『어릴 때 교회를 안 갈라치면 예수는 서양사람이니 믿을 것까지는 없고 다만 그의 행적이나 말 가운데 배울 것이 많으니 다니도록 하라고 아버지가 타이르시던 것을 생각하면 진짜 기독교인은 아니셨던 것 같다」고 농반 진 반으로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그는 아뭏든 장삿속에 빨랐던 것 같다.
어쨌든 일단 인기를 얻기 시작한 활명수는 노다지나 다름없었던 모양이다. 벌어들인 액수야 알 수 없지만 민단이 활명수사업을 거의 놓다시피 되는 기미독립만세사건 당시까지 10년간 이룬 재산만도 ▲고향 청주를 비롯한 경기도 일원의 3천석 지기 땅과 ▲충북영동 월전 마을의 월 전 금광 등 곳곳에 널려 있었다.
총독부에서까지 그때 돈푼이라도 얻어 쓸까 하고 싫다고 하는「모제르」권총을『호신용으로 써 달라』고 갖다 줄 정도였으니 아마도 이때가 민씨 집안 그리고 활명수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
엄청난 앞뒤「짱구」여서 맞는 모자가 없었던 그는 멀리「이탈리아」로 머리통을 재 보내 중절모를 주문해 쓰기도 하는 등 개인적으로도 호사를 했다. 그러나 활명수의 전성시대도 민단이 기미독립만세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일제의 서 리를 맞기 시작했다.
민단이 같은 덕 수 이씨인 이규갑 목사(해방 뒤 국회의원 역임·작고)등과 친히 지낸 것이 인연이 되어 손병희 선생에게 거사자금을 보낸 것이 나중에 탄로나 3년형을 선고받았던 것.
이 때문에 권총을 갖다 주면서까지 호의를 보이던 일경은 언제 그랬 더 냐는 듯이『불순물이 들었다』는 등 온갖 트집을 다 잡아 걸핏하면 활명수 압수선풍을 불러일으켰다(당시는 약사행정을 총독부 경무 국 보안과서 관장).
민단은 그 뒤 역시 덕수 이씨인 감방(서대문형무소=현 서울구치소)의사의 도움으로 1년만에 병 보석이 됐지만 이후 ▲운현궁 이 망공의 안동탈출사건 ▲약방에 드나들던 자칭 애국청년들의 1, 2차 고려공산당사건 ▲임정 지원사건 등으로 연신 감방을 드나들게 되고 이에 따라 활명수도 위축 일로였다.
특히 민단이 일경의 압력에 못 이겨 1923년에 부인과 아들인복을 데리고 상해로 3년간 타의의 외유를 했을 경우에는 당시 6순 이던 부친 민병호가 다시 제약일선에 나서기도 했지만 거의 판매가 안돼 명맥만 유지할 따름이었다.
인복씨에게 듣기로는 민단은 상해에 나가 있을 당시엔 할 것이 없어 활명수 장수에서 「코닥」극동대리점 주인으로 본의 아닌 변신까지 했다는 것이다.
민단은 그 뒤『앞으로는 모든 것을 다 잊고 장사나 하겠다』고 굳게 약속, 고국에 돌아왔지만 마침 세계적 경제공황이 휩쓸 때여서 활명수「붐」을 다시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31년11월4일 부친보다 앞서 죽었다(당시48세).
그는 해방 뒤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고 국립묘지 충렬 대에 안장됐다.
한편 활명수는 3대 민인 복에 이르러『활명수』라고 쓴 지 우산을 만들어 비만 오면 수천 개 씩 창경원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내보내 10전씩에 빌려주기도 하는 등 재기를 노렸으나 역시 실패, 민씨 집안을 영영 하직하고 37년2월 윤씨 집안으로 넘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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