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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신문윤리의 이상과 그 한계|대표집필 이상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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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위축되는 언론기능>
최근 2∼3년 동안에 <언론의 책임>이나 <신문의 윤리>가 긴박한 논의의 대상으로「클로스업」되고 있다. 작년, 금년 이태동안을 계속하여 IPI(국제신문편집인협회)총회에서는 세계의 언론들이 일찌기 없던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고하면서 특히「아시아」의 후진국들에 있어서는 언론의 자유가 극도로 위축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현대사회에 있어서 공정하고 책임있는 언론활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논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인간에 있어서의 신경조직과도 같은 것이어서 만약 언론활동이 주어진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자율신경이 마비된 인간과도 같은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사회의 인간환경은 문자 그대로 지구표면대로 확대되어 있으며, 인간들은 이와 같이 확대된 자기의 환경을「메스커뮤니케이션」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인식·파악할 도리가 없는 것이기 때이다. 말하자면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인간들은 자기의 환경인식활동을 신문·방송 등 언론기관에 위임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결국 현실적으로는 언론기관들이 그려 주는 환경상이 인간들의 환경자체로 오인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언론활동이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자유롭지 못하다든가 또는 그 책임을 공정하게 수행하고 있지 못할 때, 그것이 그려 놓는 환경상은 일그러지고 왜곡된 것으로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이리하여 최근 2∼3년 동안에 있어서 언론은 과연 주어진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기스스로의 임무나 책임을 왜소화시켜서 지엽말단적인 정보, 또는 현실 도피적인 회고물이나 읽을거리로 시종하고 있지는 않는가-하는 비판의 소리가 높아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문·방송들은「센세이셔널리즘」에 빠진 나머지 저속한 내용물들이나,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내용물들을 쏟아 놓고 있지 않는가 또는 개인의「프라이버시」침해나 명예훼손을 가져오고 있지 않는가-하는 점들이 날카롭게 지적되고 있는 실정이다.
말하자면 신문·방송들은 그 책임이나 윤리를 성실히 다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시급한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한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독립성회복 시급>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사회의 언론들은 자기 스스로의 책임이나 윤리를 다하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신문·방송·잡지들의 윤리강령이나 실천요강들을 정해 놓고, 거기에 비추어서 언론활동을 수행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노력이 이른바 언론기관들의 자율규제이지만은, 이 자율규제의 이론적 근거는 소위「사회적 책임이론」이라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주의이론이라는 것이 현대사회에 와서는 한계에 부닥치게 되고, 현실적으로는 언론의 책임이나 윤리가 심각한 논의의 대상으로 대두되자 영국의 왕립언론위원회라든가 미국의 언론자유위원회에서는 이러한 문제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이념으로 이른바「사회적 책임이론」이라는 것을 제시하였었다.
이 사회적 책임 이론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언론이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문화적인 여러 차원에서 그리고 개인의 생활이나 심리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인가 하는 점을 자기스스로 충분히 자각을 하고서, 주어진 책임이나 윤리를 다해야만 한다는 것이, 이 이론의 핵심적인 줄거리이다. 그리고 그 자각이나 인식을 실천하는 방도가 이른바 자율규제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언론의 자유주의 이론이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나 경제적 힘으로부터의 자유를 부르짖던 나머지 오히려 시민들의 언론의 자유는 언론기관자체의 자유로 변신되고 그것은 나아가서 공공성의 침해나 사회적 역기능을 자아내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여기에 언론의 책임과 윤리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그것의 해결책으로서 사회적 책임이론이 제시되는 것이다.
그리하여「언론의 자유주의이론」이 <…으로부터의 자유>를 부르짖는데 비하여, 사회적 책임이론은 <…을 위한 자유>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자가 소극적 자유인데 비하여 후자는 적극적 자유를 내세우는 셈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리는 어디까지나 사회·정치적인 상황이 기본적 민주주의로 안정 잡혀 있고, 민주주의적「룰」이 실천되고 있는 사회에서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언론의 자유나 자율성이 위축되어 있으며, 사회·정치적 억압이나 후진성이 깔려 있는 사회에 있어서는 여전히 문제의 핵심은 <…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따라서 후진사회에 있어서의 언론의 책임이나 신문의 윤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역시 정치권력이나 경제적 힘으로부터 자기 스스로의 자율성을 회복하는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언론이 자기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자기의 윤리를 지키고 품위 있는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스스로가 자율적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논리로 귀착된다.
언론이 이와 같은 자율적 자세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언론자신의 결의나 실천이 지속되어야 하겠지만은 그것과 아울러 독자나 시청자들의 뒷받침이 협조를 이루어야만 한다. 원래 언론의 자유라는 것은 언론기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시민의 언론·표현의 자유를 일부 언론기관에 위양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론이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이 위임받은 사항을 충실히 실천해야만 한다는 것으로 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독자나 시청자들의「알 권리」를 대행해서 인간 환경 속에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일들을 있는 그대로 알리며, 한편으로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민감하게 흡수해서 그것을 대변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신뢰도 감소 우려>
오늘날 후진사회에 있어서의 언론의 책임이나 신문의 윤리문제는 주로 언론의 자유문제로 귀착된다고 하였으나, 언론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정치권력이나 경제적 힘과의 사이에 역학관계를 이룬다. 따라서 어떤 정부이든지간에 언론과의 사이에 미묘한「다이너믹스」를 가지고 있다.
정부들은 항상 언론을 자기의 입장에서 통제하려고 하고 있으며, 기본법이나 언론의 이념은 또한 항상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 와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 양자사이의 갈등이나 긴장은 언제나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런 상황 밑에서 정치권력이 지나치게 언론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만다면 언론의 자유는 위축되고 그와 정비례해서 언론에 대한 민중들의 신뢰도는 감소되어만 갈 것이다. 바꾸어 말하여 언론의 공신력은 점차 땅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며 언론에 대한 불평·불만은 누적되어 갈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는 단순히 언론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든가 하는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사회의 뒷골목을 유언비어나 엉뚱한 풍문들이 휩쓸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병적인「커뮤니케이션」이기는 하지만 정치과정 속에서 중대한 잠재적 여론의 바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유의한다면 정치권력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상당한 정도의 언론의 자유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차원 높은 판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결국 언론이 책임을 다하고 품위를 지킬 수 있기 위해서는 언론자신의 노력과 독자나 시청자들의 끊임없는 뒷받침, 그리고 정부의 차원 높은 양식이 삼위일체를 이루어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언론이 자율성을 회복하고 그것에 주어진 책임을 다할 수 있을 때 신문의 윤리도 지탱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념은 한국의 신문이나 잡지, 또는 방송의 윤리강령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신문윤리위원회의 윤리강령을 보면 첫째가 신문의 자유, 둘째가 신문의 책임, 세째가 보도·평론의 공정성, 네째가 신문의 독립성, 그리고 다섯째가 타인의 명예와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문제, 마지막 여섯째가 신문의 품위를 지키는 것이 곧 신문윤리의 이념으로 명문화되어 있는 것이다.

<윤리는 자율성에서>
한편 신문윤리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노출되는 점은 보도·평론의 태도문제라든가 명예훼손이나「프라이버시」침해, 피의자나 미성년들의 신원을 필요이상으로 밝히는 문제라든가, 또는 저속한 내용이나 외설문제, 그리고 오보라든가 표절기사, 그리고 간접광고나 과대광고·허위광고 등의 문제가 일상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신문윤리위원회나 방송윤리위원회 그리고 잡지윤리위원회에서 정기적으로「체크」되고 있는 사례들은 가령 미성년자의 주소·성명을 밝혔다든가 사회적으로 보도할 중요성이 양식에 비추어서 인정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개인의「프라이버시」를 침해했다든가 외설적인 묘사를 지나치게 길게 하고 있다든가 작품이나 가요가 표절이라든가 하는 것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집요하게 나타나는 사례는 의도적인 간접광고들이다. 일반기사나 내용 속에 특정회사나 상품을 의도적으로 광고하는 예이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사례는 약품에 대한 절제적인 광고를 들 수 있다.
어떤 특정의 약품을 계속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그것이 가져올 가공할 부작용은 덮어둔 채 일상적인 소비품으로 선전하고 있는 문제는 문자그대로 우리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광고나 상품선전이 갖는 문제는 더욱 더 강조되어야 할 것으로 안다.
광고는 신문기사가 아니라는 관념이 의식 중에 도사리고 있으나, 독자나 시청자의 입장으로 보면 광고나 선전문 또한 어엿한 기사임에 틀림이 없다. 광고기사의 내용이나 선전문의 내용은 신문사나 방송국측의 책임 밖으로 돌릴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약품광고 밖에도 구인광고라든가, 취직알선광고, 그리고 결혼상담광고 등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차원의 이른바 협의의 신문·방송의 윤리들은 언론기관측의 양식이나, 노력으로 얼마든지 수정 가능한 차원의 문제들이다.
이러한 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점은 아무리 비판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할 것이다.
다만 각종 윤리위원회에서 계속 시정하는 방향으로 노력은 하고 있겠으나 그러면서도 계속 같은 문제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사실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이와 같은 차원의 윤리문제는 하루 빨리 지양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역시 후진사회에 있어서의 언론의 책임문제나 신문의 윤리문제는 그 핵심적인 초점이 언론의 자율성문제에 놓여 있다.
언론의 자율성이 결여되어 있을 때, 책임을 다할 수 없는 것은 자명의 이치이며, 그와 같은 언론이 여하히 품위와 윤리를 갖출 수 있을 것인가.
언론의 정상적인 기능수행은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필수부가결의 요건이며, 여기에 이상이나 고장이 생겼을 때, 그 사회에는 신경마비나 동맥경화증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되새기고 싶은 것이다.
참석자
김제형<한국신문윤리위원회·변호사> 최정호<성균관대교수·신문방송학과장> 최진우<중앙대교수·신문방송학과장> 임상원<고대교수·신문방송학과장> 이상희<서울대신문대학원교수>
주제 신문윤리의 이상과 그 한계
일시 1974년7월8일 하오3시
장소 중앙일보사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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