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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무너뜨린 무능한 왕인가, 시대에 발목 잡힌 불운한 왕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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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활용교육 (NIE·Newspaper In Education) 지면이 새롭게 바뀝니다. 시사 이슈를 다뤘던 기존의 ‘시사 NIE’는 잠시 쉬고,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역사 속 인물을 초·중·고 역사 교과서와 신문 기사를 통해 조망하는 ‘역사 NIE’를 시작합니다. 그 인물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사건도 함께 다룹니다.


① 고종(1852~1919) 비운의 왕, 망국의 황제. 청나라와 러시아·일본 등 열강의 세력 다툼에 국운을 맡겼고, 일본에 국권마저 찬탈당했다. 근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집권 내내 갈지(之)자 행보를 보였다. 한국은 지금 고종 시대와 자주 비교된다. 미·중·일 틈바구니에서 살길을 모색하는 모습이 당시와 닮았다는 얘기다. 교과서와 신문 속 고종을 통해 반면교사(反面敎師·다른 사람의 잘못된 언행에서 가르침을 얻음)의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박형수 기자

고종 조선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1대 황제. 그가 재위했던 1863년부터 1907년까지 44년은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이 변화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처음 10년 간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이후에는 부인인 명성황후와 외척인 민씨 일가가 정국을 주도했다. 국제 정세도 여의치 않았다. 청나라와 러시아는 물론 우리보다 빨리 근대화를 이룬 일본 등 열강의 틈바구니에 끼어 그는 바람잘 날 없는 삶을 살았다. 결국 그가 세운 대한제국은 일본 식민지가 됐다. 44년이나 왕위에 있었지만 한번도 진정한 왕이었던 적은 없었던 셈이다.

주요 인물: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구한말을 배경으로 하는 TV 사극의 주인공은 어김없이 흥선대원군이나 명성황후다.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고종은 훗날 TV 드라마에서도 조연일 뿐이다.

 고종 대신 권력의 정점에 선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상갓집 개’라 불리며 파락호(재산이나 세력 있는 집안 자손이지만 결국 집안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 망나니 행세를 했다. 정치적 야심을 숨긴 채 어리숙하고 미련한 척하며 정적(政敵)인 안동 김씨 일파를 속인 것이다. 고종이 12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그의 집정(정권을 잡음)이 시작된다. 세도정치를 일삼던 안동 김씨 일족을 몰아내는 것을 시작으로 왕권을 강화해나간다. 나라 빗장을 걸어잠근 쇄국정책과 천주교를 박해한 것도 당시엔 왕권 강화의 일환이었다.

 고종은 22살이 되자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왕권을 되찾으려 한다. 하지만 정작 권력을 넘겨 받은 사람은 고종이 아니라 명성황후였다. 그는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세력에 맞서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는 전략을 취한다. 흥선대원군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청을,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식이다. 조선을 침탈하려던 일본 입장에선 명성황후가 눈엣가시였을 수밖에 없다. 일본은 경복궁 안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일으킨다.

관련 사건 : 아관파천, 헤이그 밀사 파견 

고종 재위 기간 내내 우리나라는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임오군란(1882)·갑신정변(1884)·동학농민운동(1894)·청일전쟁(1894)·을미사변(1895)·러일전쟁(1904)·을사늑약(1905) 등 굵직한 사건이 줄줄이 일어났다.

 아관파천(1896)은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서 375일간 머문 사건을 말한다. 교과서에 나온 아관파천 배경은 이렇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일본은 조선에 내정 간섭을 본격화했다. 친일 개화파도 고종에게 개혁을 요구한다. 고종은 러시아를 등에 업고 일본 세력을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 러사아에 특사를 보내 차관 도입과 군사적 도움을 호소한다. 일본이 자신도 명성황후처럼 해칠까 두려웠던 고종이 궁궐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고종의 기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차관과 원조 대신 조선의 자원과 이권을 침탈하기 시작해 경성·경원의 채굴권(광산에 묻혀있는 광물을 캐낼 수 있는 권리), 압록강·두만강·울릉도 등지의 채벌권(나무를 벌목할 수 있는 권리)을 요구하는 등 각종 이권을 차지했다. 결국 고종은 러시아가 자신과 조선을 보호해주지 않는다고 판단해 1년여 만에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다.

 아관파천에 대한 고교 교과서의 서술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교학사는 ‘아관파천은 국가 체면에 손상을 주었으며 러시아가 조선의 경제적 이권을 침탈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한다. 리베르스쿨 역시 ‘국왕이 궁궐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면서 국가의 위상은 크게 손상되었으며, 정치적으로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았고, 경제적으로 이권 침탈이 심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금성출판사는 고종에 대해 유독 더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금성출판사는 아관파천 기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서양 음식에 익숙해진 고종이 환궁 후에도 ‘궁궐에 서양 음식만 전담하는 요리사를 채용할 정도로 서양 요리를 즐겼다’‘궁궐 연회에 최고급 유럽식 음식이 차려졌고 프랑스식 샴페인이 곁들여졌다’‘고위 관료들은 서양인과 교유하면서 서양 음식과 함께 커피와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일반 민중의 생활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신문물의 유입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도 많았다’고도 썼다.

 비상교육과 지학사도 비슷하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해 있을 때 서양 요리에 익숙해져 환궁 이후에도 서양식 요리와 커피를 즐겼으며 관리들도 외국 외교관과 연회 자리 등을 통해서 서양 음식을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천재교육은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황제권 강화를 위해 힘쓰는 모습을 세계 정황과 비교한다. ‘당시 세계는 입헌군주제나 공화제의 정치 형태를 띤 국가들이 많았으나, 독일은 황제가 강력한 권한을 가진 전제 정치 국가였다. 고종이 독일식 제복을 입은 것은 이같은 강력한 황제 중심의 정치 형태를 지향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다.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고종의 행보는 다시 일본에 의해 가로막힌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열강으로부터 인정받고 그해 11월 을사늑약을 체결해 한국을 강제 병합하기에 이른다. 리베르스쿨은 ‘을사조약의 최종 비준권자인 고종황제는 을사조약에 비준하지 않았으므로 국제법상 원천적인 무효라고 선언하였다’는 내용을 담았다.

 헤이그 밀사 파견은 을사늑약을 무효화하고 대한제국을 자주국으로 지키기 위한 고종의 마지막 한 수였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를 특사로 파견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선언하고 열강의 지지를 얻으려 한 것이다.

 헤이그 특사 활동과 모습에 대해 지학사 교과서는 ‘이상설·이준·이위종이 특사로 파견됐으나 대한제국에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이들은 회의에 참석하는 것조차 거부당했다’고 서술했다. 미래엔 교과서는 ‘미국의 지원을 호소했으나, 이미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미국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만국평화회의에서도 일본과 영국 등의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정황을 설명했다. 결국 나라를 지키기 위한 고종의 마지막 노력마저 물거품이 되고, 밀사 파견을 빌미로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되는 결과만 낳게 된다.

신문에서 찾은 역사 

-구중궁궐에 갇혀 ‘정의의 대국’이 오기를 고대했던 고종과 틈새전략이라도 구사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한국이 무엇이 다른가.

-구한말에는 그래도 민지(民智)를 모을 생각은 했다. 지금은 민지를 쪼개는 데에 정신이 팔렸다.

유길준이 강조한 ‘시세와 처지’는 이 시대에 더 절실한 교훈이다. 망국의 아픔이 있는 민족은 이보다 더 비관적인 진단을 안고 살아야 한다.

(중앙일보 2013년 12월 3일자 31면 ‘불길한 망국 예감)

-요즘 나라가 하도 혼란스럽다 보니 구한말에 빗대는 분들이 적잖다. 안보정세는 긴박한 데 내부 분열은 깊어만 가는 시국이 비슷하거나 더 나쁘다는 말씀들이다.

(중앙일보 2013년 12월 10일자 30면 대선 로스 타임 언제 끝나나)

-1894년 갑오년. 조선은 당시 한반도에 국권침탈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모름’의 대가는 컸다. 갑오년부터의 ‘잃어버린 10년’은 1905년 외교권 박탈(을사늑약)으로 나타났다. 2014년, 120년 만에 다시 돌아온 갑오년이다. 한반도 상황은 당시와 묘하게 닮았다. 미국·중국·일본은 한반도의 미래를 종속변수로 놓고 큰 게임을 벌이고 있다. 개화파와 척사파, 친청·친일·친러파로 나뉘어 정쟁을 벌이던 120여년 전과 현재의 진영갈등도 유사하다.

(중앙일보 2014년 1월 3일자 1면 한국, 동북아 주도권 못 잡는 건 분단 탓…신 갑오개혁 출발은 대결 완화)

-“지금은 구한말 격동기처럼 동북아의 거대한 힘의 변화가 이뤄지는 시점으로 대일 외교를 한·일 관계 틀 속에서만 보면 안된다”며 “일본이 한·미, 한·중 관계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이해하고 경제적 분야, 안보적 분야를 비롯해 통일에서 일본의 역할 등 다양한 일본의 활용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분석했다.

QR코드를 찍으면 교과서 속 고종 사진과 고종을 언급한 신문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2014년 1월 9일자 8면 일본을 보는 눈, 국민들은 현실적)

※자료: 중동고 최미정 역사 교사, 묵현초 성시온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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