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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의 미술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금년 봄「시즌」의 미술계는 그런대로 풍성한 전람회를 가졌다. 전시장이 많아진데다가 화상의 초대전이 활발해지고 봄 국전까지 생기는 등 발표의 기회가 많아졌다. 미술계가 이같이 활발해진다는 사실은 그 발전을 위해 우선 반가운 일이다. 그것은 미술계 자체의 두드러진 발표욕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의 관심과 특히 애호가로서의 구매층이 늘어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이러한 호전이 실제 작품 내용에 얼마만한 향상의 기여를 하 고있는가. 아직도 우리 미술계는 종래의 타성이나 외부적 제약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작가적 순수성을 잃고 타락할 가능성마저 없지 않다. 물론 그런 부류는 전체 미술가로 볼 때 일부분에 불과하겠지만 그러나 그들이 끼치는 영향이란 결코 묵과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현시점에서 상반기 미술계를 살펴 중점적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국전 2·4부>
종래의 국전에서 회화와 조각의 비구상 부문 (2부)이 분리된 것은 전람회장이 좁다든지 또는 한 심사위가 양편을 통괄하기 어렵다는데 있다고 선의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인줄 안다.
그러나 분리 이유를 굳이 따진다면 저의는 딴 데 있다. 오히려 시상 문제에 해마다 말썽이 많으니까 서로 독립해 편안한 방편을 강구하는데 불과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눈을 돌려야할 점은 현대 미술에 있어 구상이니 추상이니 반추상이니 하는게 있을 수 없고 그런 구분조차 필요치 않다는 점이다. 또 심사 위원이라면 응당 현대 미술 전반을 다 볼 줄 알아야 마땅하다.
오늘날의 작가들은 회화며 조각 혹은 그 밖의 다른 소재와 기법을 자유 자재로 구사하는데 유독 심사 위원만이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봄 국전의 경우, 그 상은 좁은 폭 안에서의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내고 있다.
상이 상징성을 띠지 못할 때 그것은 무용한 것이며 도리어 저해의 구실이 된다.
하나의 작품이 한 사회 체제 안에서 한 사람을 평가하는 가치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 현대 조각 대전>
국립 현대 미술관이 한국 현역 백인전에 이어 조각 분야를 한자리에 모아본 것으로 한번은 있어야할 기획이다. 다만 백인전이 초대한계를 그 나름으로 그었던데 비하여 조각전에서는 작고 작가와 신인까지를 포함시켜 50년 사를 펼쳐놓았다.
50년 조각사에 특출한 작품이 그리 없다든지 또는 작고 작가들에 어떤 아쉬움을 느끼게됨은 그만큼 조각계의 여건이 여의치 못한데다 대체로 안이한 제작을 답습했다는 말도 된다.

<미술 회관 설치>
미술 회관 같은 기구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지만 결국 운영의 효과에 문제가 있다. 현재는 단지 전시장소로만 활용하는데 그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구의 필요성은 작가들이 대중과 접촉하는 장소를 제공한다던가 대가와 신인이 의견을 나누는 그런 대화의 광장 역할을 한다는데 보다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래서 공개적이면서 깊이 파고드는 장소가 될 때 바로 미술 회관은 미술계를 위해 밑거름이 될 것이다.

<개인 작품전>
지난 6개월 동안에 숱한 개인전 및 「그룹」전이 있었던게 사실이지만 유독 짚어들만한 게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개인전으로는 이종우 화백의 회고전이나 변관식 서세옥 박성환 박창돈 박래현씨나 작고 작가로서 나혜석 구본웅 유작전 등이 통상 지적되겠는데 이제는 새로운 경향으로 눈을 돌려야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동양화」 「한국화」니 하는 편견도 그만 깨뜨려 하나의 회고나 조형 미술로서 통칭되어야 하겠다. 종래의 「동양화」란 기준의 고정 개념에 집착된 것이라면 몰라도 그것을 탈피코자 했을 때 동양화란 칭호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이러한 여러 점으로 보아 최근의 현대화 회전은 분명히 주목할만한 「그룹」전이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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