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사 정립에 생애 바친 고 우현 고유섭씨 30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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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7일 인천시립박물관 정문 앞에 추모기념비가 세워진 우현 고유섭씨는 한국고미술연구에 전 생애를 바친 분이었다.
1904년 인천에서 태어난 우현은 경성제대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했다.
특히 한국고미술을 연구했고 30년 이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는 미학연구실의 조수로 근무했다. 33년 그는 개성의 자남산위에 자리잡은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취임, 44년 간경변증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11년간 한국고대미술연구에 온갖 정력을 다하였다.
그때까지 거의 도외시되었던 미학을 한국인으로 처음 전공했고 특히 일제의 한국문학 말살정책에 항거하여 전통회화로부터 탑에 이르기까지 고대미술 전반에 걸쳐 큰 업적을 남겼다.
일본인이나 서양인의 연구에 대결, 그는 잘못된 고증을 바로 잡고 새로운 해석과 이 해법을 제시하면서 한국미술사의 정립에 혼자 애썼다. 단원의 출생연대를 수정했고 청기와의 도요지를 전남 강진으로 추정했으며 『우리의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므로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미학관을 폈다.
그는 일제말기 병석에 누워서도 항상 고미술연구에의 집념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일본의 패망이 가까웠으니 하루 속히 건강을 회복하여 재기해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그는 또 40년「고려시보…에 실은 논문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에서 동해의 대왕암을 찾으라고 당부하기도 했었다. 그것이 발견되기 20여년 전의 일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일제에 눌려 빛을 보지 못했던 그 유고들은 하나씩 출간되기 시작했다.
한국고미술계의 중진인 황수영 최순우 진홍섭 제씨가 중심이 되어 46년 『송도고적』이 처음 나왔다. 이 책은 그가 직접 교정까지 끝냈던 것이었다.
그밖에 『조선탑파의 연구』(48년) 『조선미술문화사 논총』(49년) 『고려청자』(54년) 『전별의 병』(59년) 『한국미학급미술사 논고』 등의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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