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조작된 광복회 10대 강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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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25년 1월 소·일간에 수교조약이 체결되고 그 조약 속에 양국의 치안을 해치는 행동을 서로 금지한다는 규정마저 있어서 소련의 지원을 얻어 조국의 독립을 쟁취코자 했던 한인혁명가들이 타격을 받게됐다. 수교조약과 함께 소련은 대일 외교상의 배려도 있고 해서 「코민테른」민족부 극동총국「코르부로」(고려국)의 후신인 「오르그부로」(조직국)마저 해체해 버렸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이 한국혁명지원의 기관마저 없어지자 이동휘는 실망한 나머지「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스찬」근방의 한 한촌으로 은퇴했으며 오성륜은 배후지를 잃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1925년 6월엔 조선총독부의 삼시 경무국장과 봉천성 경무처장 사이엔 삼시협정이란 재만 한인독립운동취체조약이 맺어졌으므로 오성륜은 1926년 중국대륙의 혁명중심지인 광동으로 갔다.

<오성륜, 「함성」별명도>
많은 한인혁명가들도 속속 광동으로 몰려들어 중국혁명에 참가하는 가운데 의열단원들이 제일 많았었다.
북만과 간도지방에 크게 뿌리를 내린 적기단의 조직은 오성륜이 떠난 후에도 만주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한인사회에서 상당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오성륜은 광동에서 이내 중공당 당원으로 활약했다. 그는「코민테른」당원증을 갖고 있었으므로 중공당에 발붙이기가 쉬웠다. 당시 광동의 한인공산주의자들은 중공당의 한인지부에 속해있으면서 그중 더러는 중국인 중공당원과 마찬가지로 국민당에도 적을 두고 있었다. 이때 오성륜은 함성이란 별명을 쓰고 있었다.
오성륜은 해륙풍에서도 활약하다가 향항을 거쳐 상해에 잠입해 있던 중 1929년 가을 그는 중공당 본부로부터 입만지령을 받았다. 그는 만주로 건너가 남만의 반석현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전광이란 별명을 쓰기 시작했다. 오성륜의 행적을 말해 주는 기록은 수다히 많다. 그만큼 그는 여러 해에 걸쳐 넓은 무대에서 중요사건마다에 관계했던 사람이다. 「에드가·스노」의 부인이었던 「님·웨일즈」의 『아리랑의 노래』란 책은 사실과 어긋나는 점도 많이 있으나 우리가 전혀 몰랐던 역사의 중요한 그늘을 비쳐 주는데 유익하다. 그러나 연구가들은 오성륜이 함성과 또 전광과 동일인이라 하는 점을 모르고 지나친 흔적이 짙다.
동일인임을 입증해주는 산 증인으로(전 대한일보 논설위원) 허자성씨와 (조선혁명군 제1사 사령이었던 최석용씨-본 연재 18회 참조 등이 있으며 또 희귀하나 일만 측 기록도 있다) 이상과 같은 경력을 가진 오성륜의 「재만 한인조국광복회」의 선언은 계급투쟁의 색채는 하나도 없고 전적으로 한일광복의 민족적 호소에 넘쳐있다. 그것은 철두철미 민족주의적 독립운동단체임을 표방하고있다.
명칭부터 그렇다. 한인, 광복 등은 민족주의자들의 용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인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과 공산당의 극좌적 행패에서 이탈되었던 한인농민들의 민심을 끌어 모으려는 만주중공당의 한 전술적 결사이며 공산당의 민족통일전선전술의 한 상투적 방법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전문은 매우 장문인데 북한에서는 이 선언을 김성주가 기초했다고 주장하면서도 한번도 그 전문을 밝힌 일이 없다. 고작 두서너 줄 선언문의 일부를 인용만 하고 있는데 그것도 변조·왜곡된 인용일 뿐이다. 그러나 선언문중 10대 강령은 완전히 변조해 그것을 김성주가 만든 것으로 날조하고 있다. 10대 강령도 그 선언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민족독립을 쟁취키 위한 투쟁방법의 호소였을 뿐 북한에서 말하듯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투쟁이론이 아니다. 원래의 10대 강령은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제1조 한국민족은 단체와 개인을 구별하지 않고 국내외를 막론하고 단결하여 강도 일본 놈들과 투쟁하여 조국의 독립해방을 완성할 것.
제2조 왜놈의 식민지통치하에서 선전하는 기만적 자치를 굳게 반대하고 중한민족의 긴밀한 연합으로써 공동의 적인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여 재만 한인의 진정한 자치를 실현할 것.

<북, 선언문 밝힌 일없어>
제3조 왜놈과 중한주구의 재산 및 무장을 탈취하여 재만 한인의 자치와 조국광복을 위해 끝까지 싸울 각종 무장대를 조직할 것.
제4조 왜놈, 중한주구의 총유재산을 몰수하여 한인실업자를 구제할 것.
제5조 일체의 가렴잡세를 폐지하고 왜놈의 경제독점정책에 반대하며 공농상업을 발전시켜 공·농·병·청년·부녀 및 일체의 노농군중의 실제생활을 개량할 것.
제6조 언론·집회·결사 및 각종 반일투쟁의 자유를 실현할 것.
제7조 왜놈의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하고 면세교육을 실행하며 민족문학 고양을 위해 특별평민학교를 설치할 것.
제8조 왜놈의 한인에 대한 병역의무제도를 폐지하고 반혁명적, 반소·중국혁명진공 등외 전쟁 참가에 반대할 것.
제9조 일본의 총유법령·체포·구금· 도살 등의 백색공포정책에 반대하고 총유정치범인을 석방할 것.
제l0조 한국민족에 대해 평등대우를 하는 민족과 친밀히 연합하고 동시에 한국독립운동에 대해 선의의 중립을 지키는 국가민족과 우의적 관계를 지킬 것.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10대 강령은 당시의 독립운동가라면 누구나 언급할 수 있는 상식적인 내용이다. 여기에는 공산주의도 계급투쟁 이론도 없다.
북한측이 말하는 10대 강령은 한마디로 말해 해방 후 소위「북조선인민위원회」가 내걸었던 기본강령에 맞추어 꾸며 놓은 것이다. 그래놓고 1936년에 작성된 이 조국광복회의의 10대 강령이야말로 해방된 조국에 세울 정권형태와 그 정강정책을 그때 이미 내다보고 정해놓은 것이라고 기만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왜 김성주가 하지도 않은 「조국광복회」를 조직했다느니, 그 선언·강령을 작성했다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꾸몄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레닌」도 모택동도 모두 자기조직을 갖고 혁명운동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자랑할만한 이론적 노작들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김성주에게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재만 한인조국광복회」에 빗대어 조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성주는 광복회의 발족과 그 선언강령작성에 아무런 관계도 없었을 뿐 아니라 관계할만한 위치에도 전혀 있지 않았다. 동만특위위원 오성륜 등에 의해 발족된 광복회는 그 지방조직의 뿌리를 장백현하 한인농촌을 중심으로 내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담당한 것이 제2군제6사장 김일성(김성주가 아님) 이었다. 제6사장 김일성은 상부인 오성륜 등의 광복회 지방조직 지시를 받고 제6사 정치위원 위민생과 의논한 끝에 대내 유력한 공산당원을 선발하여 1936년 10월께부터 정치공작원으로 장백현내 각 부락에 파견하였다.

<「인민위」강령에 맞춰 개작>
그때 제6사는 국내의 갑산·혜산 등지와 연결이 쉬운 대안, 장백현 일대를 유격구로 삼고 있었으며 병력은 1백∼2백명 정도, 주로 한인이 많은 부대였다.
1937년 2월 중순 제6사장 김일성은 중공당 동만특위의 하부기관인 당장백현위에 나서 정치공작위원회의 총책임에 권창욱, 청년부 책임에 장조열, 부인부 책임에 황금옥을 앉히고 이와 병행하여 대중조직인 광복회의 지도지관으로서 장차 광복회 장백현회가 될 선행조직인 「재만 한인조국광복회 장백현 공작위원회」를 총책임 이제순, 청년부 책임 장조열, 부인부 책임 황금옥으로 조직케 했다.
이렇게 하여 장백현안 뿌리를 내린 중공당 및 광복회의 지방조직은 이른바 혜산사건으로 전 조직이 괴멸될 때까지 당특지부 3, 당지부 1, 당소조 10, 그리고 광복회의 구회 4, 지회 11, 분조 41, 반 10, 생산유격대(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나 유사시엔 무장봉기를 하는 전위적 실천기관) 4의 조직으로 확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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