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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둥지 짓듯, 동·서양 모든 재료 아울러 새 학문 구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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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박이문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다투는 그의 ‘파우스트적 열정’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것이다.”(문학평론가 김병익)

 “고향을 잃어 빈곤해진 세대의 ‘헝그리 정신’이 만든 한국적 철학.”(서울대 철학과 김상환 교수)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필운동 푸른역사아카데미. 한 노학자의 삶과 학문적 업적을 기리는 이례적인 자리가 열렸다. 중진·원로를 아우르는 예닐곱 명의 동료 학자, 10여 명의 청중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진행됐다. 문학·철학을 넘나드는 광범한 지적 편력을 통해 독창적 한국철학의 가능성까지 제시한 박이문(84) 미 시몬스대 및 포항공대 명예교수에 관한 이야기다. 박이문의 ‘전모’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사회학자 정수복 박사의 『삶을 긍정하는 허무주의』(알마) 출간 기념을 겸하는 서평회였다.

정수복(左), 김병익(右)

 1930년생인 박씨는 서울대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 이후 프랑스 소르본 대학과 미국 남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각각 불문학·서양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왕성한 지적 호기심으로 『예술철학』 『둥지의 철학』 등 100여 권의 책을 썼다. 저서 목록에는 『눈에 덮인 찰스 강변』 『부서진 말들』 등 시집도 여러 권 들어 있다. 그의 사상을 요약한 표현인 ‘둥지의 철학’은 동서양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독자적인 특성을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새가 잡동사니를 물어다 둥지를 짓듯 인간도 각자의 언어·관념을 통해 체계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박씨는 ‘인희’라는 본명 대신 주로 ‘이문(異汶)’이란 필명을 써왔다. 남과 다른 자기만의 색채와 향기를 가진 문장, 즉 ‘이문(異文)’을 향한 꿈이 담겨 있다.

 이날 모임은 그런 박 교수에 대한 동료·후학들의 재평가 성격을 띄었다. 당초 참석하기로 했던 박 교수는 건강 문제 때문에 이날 함께하지 못했다.

 서평회는 원로·중진으로 나뉘어 박 교수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면서 활기를 띄었다. 원로는 대체로 호의적이었고, 중진은 상대적으로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정대현(73)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박이문은 철학의 핵심 주제인 존재론·인식론과 평생 씨름해 ‘둥지의 철학’을 집대성한 한국 철학의 소중한 귀감”이라고 평했다. 강학순(61) 안양대 철학과 교수는 “적대주의와 독단론이 횡행하는 사회일수록 모든 것을 보듬는 학문과 삶의 방식이 요청된다”고 말했다. 박 교수의 학문 태도가 그렇다는 얘기였다.

 반면 작가 강창래(55·『책의 정신』 저자)씨는 “윗세대 지성의 삶과 학문을 조망하는 책이 나온 건 가치가 크다”면서도 “박이문 철학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이상론과 마찬가지로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고 비판했다.

 김상환(54) 교수는 “박이문 선생은 틀림없이 계승할 부분이 있는 한국 철학자의 선두”라면서도 “비극적 역사를 통과했기에 지적으로 강인하지만 사회적 유산은 상속받지 못한 세대의 헝그리 정신에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평했다.

 이렇게 박이문의 철학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렸지만 한눈 팔지 않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평생 천착해온 그의 열정에는 모두 공감을 표했다.

 박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삶을 긍정하는…』에 대해 “무척 고마운 책인데, 서평회까지 열어줘 고맙다. 건강이 괜찮으면 참석하려 했는데…”라고 말했다.

 젊은이들에 대한 조언을 부탁하자 “사는 데 도움이 될 말을 하라면 자신이 없다. 인생은 누가 지시하고 인도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의 인생은 스스로 온 힘을 다해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예술작품이 돼야 한다”고 했다.

이정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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