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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정호성 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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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푸른 빛이 감도는 남극의 얼음 조각에 위스키를 넣어 만든 이른바 '만년빙(氷) 칵테일'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남극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대구를 썰어 안주로 곁들이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지요."

2001년 12월부터 1년간 남극 세종기지에 파견됐던 남극과학연구단 제15차 월동연구대장 정호성(鄭豪城.45)박사.

그는 보통 사람은 평생 한 번도 가보기 어려운 남극을 열여섯 차례나 다녀왔다. 또 남극에서 6년이나 살았다. 그는 스스로를 "운이 좋은 '남극 사나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남극생활이 자신과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하는 고된 시간의 연속이지만 미지의 땅에서 온 몸으로 자연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15차 월동연구대는 지난 6일 경기도 안산시 한국해양연구원에서 해단식을 했다. 지난해 12월 제16차 월동연구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돌아왔지만 鄭박사가 지난 1월 연구활동을 위해 남극으로 다시 떠났다가 2월 말 귀국했기 때문에 해단식이 늦어진 것이다.지난 10일 경기도 안산에 있는 한국해양연구원에서 만난 鄭박사는 앳된 소년 같은 인상이었다.

"올 초 남극에 다시 간 것은 남극식물을 연구해 온 학자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습니다. 남극은 우리나라와 달리 1~2월이 여름입니다. 이때 눈이 녹고 식물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만큼 식물생태계 변화를 보다 자세히 관찰하고 자료를 모을 수 있죠."

鄭박사는 우리나라 남극 진출 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가 남극과 인연을 맺은 것은 자신이 사무국장으로 일했던 한국해양소년단이 국내 최초로 남극관측탐험대를 파견했던 1985년이다. 당시 해양조사선을 타고 남극해를 탐험했던 그는 남극에 우리나라 기지가 없었던 탓에 남극 주변 바다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의 남극행은 우리나라가 서남극 남극반도 인근에 있는 킹조지섬에 세종기지를 준공했던 88년 2월 제1차 월동연구대에 선발돼 1년간 현지에서 근무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초기에는 남극생활을 해 본 사람이 없어 우여곡절도 적지 않았다.

"밤마다 블리자드(폭풍설) 때문에 건물이 흔들렸어요. 이러다가 건물이 날아가는 게 아닐까 겁이 나기도 했죠. 또 1년간 먹을 예정으로 준비해간 부식이 턱없이 모자랐어요. 추운 날씨로 열량이 많이 필요한 만큼 많이 먹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몰랐던 것이지요. 세종기지를 짓고 돌아가는 건설단이 남긴 부식을 빼앗다시피 하고도 모자라 나중에 칠레 공군수송기편으로 보급을 받고서야 첫 해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99년에도 1년간 월동연구대장으로 일했다. 이 밖에도 세종기지 건립 이후 하계연구단 일원으로 해마다 두달 가까이 남극에서 연구활동을 벌였다.

"남극은 지구환경 변화를 알 수 있는 최적지이자, 자원의 보고입니다. 지난 15년은 우리나라가 남극 대륙에 대한 경험을 축적한 시기라고 볼 수 있죠. 앞으로는 남극 자연생태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에 나서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최근 쇄빙선(碎氷船) 도입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때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이라고 한다. 쇄빙선은 바다에 떠있는 얼음을 깰 수 있는 배다.

쇄빙선이 있으면 남극 생태계 조사 외에도 남극 대륙에 제2기지를 건설할 수 있다. 더불어 빙하학.고층대기 물리학 등 남극 대륙이 아니면 연구하기 힘든 영역에도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다.

鄭박사는 지난해 월동연구대장으로서 16명의 대원을 지휘하는 게 쉽지마는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겨울 시즌(4~9월)에는 하루 네 시간만 밖이 환하고 나머지 시간은 칠흑같이 어두워 바깥활동이 어려운 탓에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많기 때문이다.

그나마 99년 인터넷이 뚫려 외부세계와 단절됐다는 느낌이 다소 줄어들었다. 또 대원들과 함께 고무보트를 타고 세종기지 앞의 맥스웰만 건너편에 있는 외국 기지에 찾아가 벌인 운동시합도 고독감을 덜어주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모처럼 날씨가 좋으면 대원들과 설상차(雪上車)를 타고 4㎞ 가량을 달려 산꼭대기에 올라가곤 했죠. 그곳에서 세종기지가 있는 해안까지 스키를 타고 내려오죠. 찬 공기 속에서 즐기는 스키는 스트레스를 순식간에 날려버리죠. 만년빙 위에서 여는 고기 파티로 동료애를 키우기도 했죠."

다시 문명세계로 돌아온 소감은 어떠할까. "1년간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낼 일이 없어 그랬는지 돌아와 보니 카드 이용 한도가 크게 줄어 있더군요. 돈이 필요없었던 남극생활이 벌써 그리워지네요. "

하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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