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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레알 폴리티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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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호 29면

독일 통일을 이룬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 총리는 흔히 ‘철혈(鐵血)재상’으로 불린다. 1862년 9월 연설에서 비롯된 별명이다. 당시 프로이센의 총리 겸 외무장관에 임명된 비스마르크가 맡은 첫 임무는 군사비 증액에 반대하는 의회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예산소위에 출석해 “프로이센의 위상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힘으로 결정된다. …시대적 과제(통일)는 연설과 표결이 아닌 철과 피(Eisen und Blut)로써 이룰 수 있다”는 연설을 했다.

그는 군비 증강과 3차례의 전쟁 승리로 통일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1863년 덴마크와 치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과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1870~71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그것이다. 힘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한때 나폴레옹의 프랑스 등 강대국에 설움 받던 나라가 부국강병으로 역전을 이룬 역사적 사례라며 흥분한다.

하지만 수많은 역사가는 이를 한 측면만 본 것이라고 지적한다. 영국 출신의 미국 역사학자 폴 케네디가 대표적이다. 사실 비스마르크는 노련한 외교관이었으며 힘을 과시하지 않고 오로지 국익을 위해 필요할 때만 한정적으로, 적절하게 활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1866년 7월 3일 오스트리아군을 지금의 체코 북부인 쾨니히그레츠에서 괴멸시킨 뒤 보여 줬던 냉철한 자세를 그 증거의 하나로 제시했다. 프로이센군 수뇌부는 곧바로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점령하자고 주장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상대국에 모멸감을 줘선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전쟁의 목적은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을 이루는 것이지 군사력 과시나 상대방 모욕이 아니라는 것이다. 강대국인 프랑스나 러시아를 자극해 군사 개입을 부추길 우려도 있었다.

이 한 수는 결국 성공해 오스트리아는 통일 과정에서 군말 없이 이탈했으며 북독일의 여러 나라는 프로이센에 줄을 섰다. 1870~71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수도 파리를 포위했을 뿐 굳이 점령하진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전쟁의 승리로 독일은 통일을 이뤘다.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냉철한 국제정책을 레알폴리티크(독일어로 현실정치라는 뜻)라고 부른다. 민족주의·국력과시·자신감·패권 등 관념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적 필요성과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국익과 목적에 충실한 실용주의다. 레알폴리티크에 따라 유럽은 1871년 전쟁 이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까지 40년 이상 강대국 간 물리적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갈등은 외교로 조용히 해결됐다.

하지만 이후 이를 폐기한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딱 100년 전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휘말렸다. 인내가 필요한 외교보다 화끈해 보이는 무력을 택했지만 전쟁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인류의 대참사를 초래했다. 자신과 상대의 힘, 국제적 상황을 냉철하게 살피지 않고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켜 보겠다는 망상에 빠진 대가가 아닐까. 거기서 제대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바람에 역사는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으로 반복됐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다보스 기자회견에서 동북아시아 상황을 거론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을 언급했다. 설날을 하루 앞두고는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 단독제소 검토라는 도발적 발언으로 명절 기분을 잡치게 했다. 아베는 비스마르크 전기라도 읽으며 동북아의 레알폴리티크를 곰곰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역사의 비극적 반복을 진정으로 막고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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