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맏이로 산다는 것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60호 31면

누구나 최초가 되고 싶어한다. ‘프런티어 시장’이라는 용어가 존재하는 이유는 기업들이 미개척 시장에 진출하는 위험요소를 안으면서도 경쟁이 본격 시작되기 전인 곳에서 시장 점유율 우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는 동종 업계 경쟁 본격화 이전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창립하기 위해 하버드대를 그만뒀다. 사람들은 진화론자 알프레드 러셀 월레스 대신 (최초로 진화론을 펼친) 찰스 다윈을 기억한다.

한국인들 또한 ‘최초’라는 타이틀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김연아 선수의 인기가 높은 건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한국인 최초로 피겨스케이팅 종목에서 은메달이 아닌 금메달을 따냈기 때문이다. 한국인 최초 노벨 문학상 수상자에 대한 열망은 계속된다.

그러나 모든 한국인이 최초가 되고파하진 않는다. 가족에 있어서 최초의 아이인 맏이가 대표적 예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이란 잡지에 따르면 서양에선 맏이에 대해 알프레드 애들러라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동시대 철학자가 연구를 한 이래 6만5000여 건의 연구가 행해졌다. 최근 연구는 더 과학적이고 더 도발적인데, 그중 한 연구는 자녀 출생 순서가 뒤로 밀릴수록 IQ가 낮아진다고 주장한다. 부모가 늦게 태어난 아이들에게 신경을 덜 쓰게 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맏이 신드롬’이라는 용어는 심리학계에선 흔한 말이다. 프랭크 설로웨이의 ‘타고난 반항아’라는 연구에 의하면 맏이는 “성취지향적·적대적·적극적이며 불안감이 높고 질투심이 많고 계획적”이다. 그러나 일반론이 들어맞지 않는 특수한 경우는 있는 법. 한국처럼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사회에서 맏이가 된다는 건 독특한 도전이다.

한국에서 맏이는 곧 그 가족을 대표한다. 맏이가 태어나면 어머니는 그 아이의 엄마로 불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다. 자신의 친구들이며 가족, 심지어 남편까지 그를 ‘원택이 엄마’라는 식으로 부른다. 탄생과 함께 죽음이 온다. 축하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슬픔의 순간이기도 하다. 이원석이라는 엔지니어 친구는 “내 엄마가 내 이름으로 불리는 걸 듣는 게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부담스럽기도 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엄마에게 영향을 줄 테니까”라고 말했다. 엄마는 거울이, 맏이는 결과가 된다. 이건 역할 속 역할이다. 이름의 영원한 울림은 흐르는 강물처럼 깊다.

독일인 중세 시인 하인리히 데어 그리헤채레가 말했듯 피는 물보다 진할 수 있다. 한 건설회사의 젊은 독신 CEO는 “내겐 혈통을 이어야 할 책임이 있다. 형이 있다면 내가 하고픈 대로 할 수 있겠지만”이라고 토로했다. 혈통을 잇는다는 것은 어깨 위에 놓인 무거운 짐과 같다. 한때 예술가를 꿈꿨지만 포기하고 가업을 잇기로 한 그 독신 CEO는 말했다.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 화를 낼 수는 없다. 이게 내 인생이다.” 다른 이들이겐 가계를 잇는다는 것은 더 복잡한 일이다. 어떤 이는 그가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혈통을 잇는 대신 학업에 열중해 부모님을 만족시켜 드리기로 했다고 했다.

맏딸의 경우는 어떨까. 한 익명의 여성은 전후 시대 많은 맏이들처럼 자신의 꿈을 희생하며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어렸을 때 여의었기에 동생들에게 내가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돼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여전히 많은 맏딸에겐 꿈과 야망과는 상관없이 결혼을 해야 한다는 압력이 제일 세다. 시대는 변했고 더 많은 한국 여성들이 직장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사회 구조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익명의 어떤 남성은 고백했다. “맏아들이셨던 내 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우주의 중심이었고, 맏아들인 나 역시 그렇다. 힘엔 책임이 따른다.” 한국에서 자녀의 성별은 여전히 출생 순서에 우선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그 때문에 누가 덕을 보는 건지는 의문이다.



크리스 리 한국계 미국인 작가로 『떠도는 집(Drifting House)』(펭귄)으로 데뷔했다. 연세대 언더우드 국제학부(UIC)에서 문학창작을 가르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