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대표팀 흔드는 손 … 모스크바는 불안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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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러시아 축구대표팀은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1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나선다. 자국 리그 급성장, 명장 파비오 카펠로 감독 기용 등 긍정적인 요인의 이면에는 사령탑과 축구협회 간 갈등, 뒤숭숭한 선수단 분위기 등 불안 요소도 있다. [사진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러시아인들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진심을 보여준다. 지난 20일 모스크바 시내 한국대사관에서 마주한 위성락(60) 주러시아 한국대사는 “러시아인들은 서구인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아시아와 더 가깝다.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 걸 미덕으로 여긴다”면서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정은 한국인들 못지않게 깊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보여주는 진지함과 단결력 또한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러시아 축구는 무표정한 그들의 얼굴만큼이나 베일에 가려져 있다. 브라질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강호 포르투갈을 제치고 조 1위로 본선행을 확정 지은 실력자이면서도 리그 운영 시스템이나 월드컵 준비 과정은 제대로 알려진 게 없다. 현장에서 들여다본 러시아 축구의 키워드는 ‘정중동(靜中動)’이었다. 자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하는 2018년을 목표로 삼아 조용히, 그리고 착실히 내공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남몰래 감춰 왔던 상처와 약점 또한 적지 않았다. 6월 18일 월드컵 본선 H조 첫 경기 상대인 한국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할 부분이다.

아킨페프(左), 카펠로(右)

 ◆러시아식 자존심, 자국 리그 제일주의=러시아는 H조의 또 다른 경쟁자 벨기에와 마찬가지로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12년 만에 본선 무대를 밟는다. 컴백 과정은 정반대다. 주축 선수 대부분이 해외 빅 클럽 소속인 벨기에와 달리 대표팀을 국내파 위주로 채웠다. 자국 리그의 내실을 다져 A팀의 경쟁력을 끌어올린 결과다.

 21일 모스크바 시내 러시아축구협회에서 만난 니콜라이 톨스티흐(58) 러시아축구협회장은 “2000년대 초반부터 정부와 축구협회, 그리고 클럽들이 긴밀한 협력 체계를 만들었다. 유망주들이 국내에서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는 게 목표였다”면서 “연봉·수당 등 선수들의 처우는 물론 축구 산업 종사자들의 근로 조건까지 대폭 개선했다. 축구 관련 인프라 확충에도 힘썼다”고 말했다.

 자국 리그 중흥 바람을 타고 CSKA 모스크바,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디나모 모스크바, 안지 마하치칼라 등 거대 자본을 투자한 클럽들이 등장해 리그 이미지 개선을 주도했다. 이후 아스널(잉글랜드) 소속이던 안드레이 아르샤빈(33·제니트), 첼시(잉글랜드)에 몸담았던 유리 지르코프(31·디나모 모스크바) 등 빅 리그에서 뛰던 스타급 선수들이 모두 러시아로 컴백했다.

 국내파 위주인 대표팀의 ‘국제 감각 부족’은 베테랑 사령탑의 영입으로 상쇄했다. 러시아는 유로2008을 기점으로 거스 히딩크(68), 딕 아드보카트(67·이상 네덜란드), 파비오 카펠로(68·이탈리아) 등 베테랑 지도자들에게 대표팀 지휘봉을 맡겼다. 톨스티흐 회장은 “그간 러시아 축구에는 없던 새로운 전술과 운영 방식을 도입하고자 했다. 세계적인 명장의 경험과 노하우를 사오겠다는 것”이라면서 “이런 노력과 투자가 ‘12년 만의 월드컵 본선행’이라는 열매로 나타났다”고 했다.

 ◆쇄국축구의 그림자, 감춰왔던 상처들=러시아 프리미어리거 위주로 뭉쳐 조직력이 남다른 러시아 축구지만, 약점도 적지 않다. 러시아 일간지 ‘노바야 가제타’에서 16년째 축구를 취재 중인 루슬란 리파토비치(36) 스포츠팀장은 “러시아가 매우 잘 만들어진 팀이라는 사실은 동의하지만, 취약점도 적지 않다”면서 “개인적으로는 월드컵 본선 단골인 한국이 경험을 앞세워 H조 1위로 16강에 오를 것 같다. 러시아와 벨기에가 2위를 다툴 것”이라고 전망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약점은 특정 선수들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것이다. 리파토비치 팀장은 “골키퍼 이고리 아킨페프(28·CSKA)가 대표적이다. 동료들이 ‘제두시카(할아버지라는 뜻의 러시아어)’라 부르며 의지하는 리더인데, 이 선수가 없을 땐 대표팀 전체가 흔들린다”고 말했다. 이어 “세르게이 이그나셰비치(36), 알렉세이 베레주츠키(32) 등 CSKA 선수들로 구성된 수비진 또한 한 명만 빠져도 공백이 확실히 드러난다”고 했다.

 카펠로 감독과 축구협회의 갈등 또한 불안 요소다. 리파토비치 팀장은 “카펠로 감독의 독단적인 운영 방식이 문제다. 축구협회와 툭하면 충돌하는 데다 의사소통도 제대로 하지 않아 ‘감독의 청사진을 읽을 수가 없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소리가 높다”고 귀띔했다. 이어 “최근 안정적인 대표팀 운영을 위해 4년간 재계약을 했지만, 감독에 대한 협회의 신뢰감은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러시아 현지에서 떠도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이름의 루머도 선수들의 집중을 방해한다. 대표팀 주전들이 브라질 월드컵 활약 여부에 따라 몸값과 이적할 팀이 결정돼 자신의 의사와 상관 없이 팀을 옮길 것이라는 내용이다. 리파토비치 팀장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스포츠계 권력자에 의해 ‘선수 이적 시나리오’가 만들어져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면서 “선수들이 원치 않는 팀으로 갈 수 있다며 불안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송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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