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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들, 한국사회 정착까지 겪은 애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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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입학을 앞둔 임철(오른쪽)씨와 통일부 통일교육원 전문강사로 일하고 있는 채진아(왼쪽)씨. [대통합위 제공]

“탈북 학생들에게 취업 때 일반 청년과 똑같은 스펙을 요구한다.”

“부모가 탈북자지만 제3국에서 태어나면 지원을 전혀 못 받는다.”

“탈북자가 운영하는 가게에는 손님이 안 온다.”

“기초수급자 지원을 받으려고 탈북 여성은 혼인신고를 못한다.”

28일 서울 광화문 국민대통합위 회의실에서 열린 ‘북한이탈주민 청책(聽策) 간담회’에선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겪은 우여곡절과 애환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간담회는 탈북자들의 고충을 생생하게 듣기 위해 대통령 직속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가 마련했다.

2002년 남한으로 온 한의사 김지은씨는 공무원들의 관료주의를 지적했다.김씨는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공무원들이 ‘북한에 가서 (한의사) 자격증을 가져오세요’라고 할 정도로 다소 황당한 요구를 했었다”며 “지금은 그런 얘기는 안 하지만 조금이라도 행정적인 절차가 복잡하거나 (과거에) 없던 일이면 일체 ‘노’라고 하고 손을 뗀다”고 아쉬워했다.김씨는 “저도 (적응하기가 힘들어 자살하려고)유서를 썼던 사람”이라며 “정부에서 (탈북자에 대한) 인식을 바꿔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북한에서 8년 동안 한의사로 일했다는 김씨는 남한 정착후 정부가 북한 경력을 인정하지 않아 한의사 자격을 얻지 못하다가 남한에서 대학 과정을 다시 밟은 뒤 한의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있다는 임철씨는 “14살 때 한국에 와서 중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일반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며 “고등학교 입학할 때 일반 기초과정을 한국에서 교육받지 못한 상황이어서 굉장히 두려웠는데, 기초교육이 안 돼있다보니 반편성고사에서 뒤에서 5등을 했고, 그 때부터 많이 주눅이 들었다”고 회상했다.그러면서 “저는 항상 외톨이였고, 누구도 제가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았다.왕따가 될까봐 두려워 친구들에게 탈북자라는 얘기를 하지 않다가 졸업할 때쯤에야 말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담임 교사의 관심과 격려로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전공한 그는 탈북 학생들의 대학원 교육비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임씨는 “학부 때까지는 정부 지원이 있어서 (등록금) 문제가 없다”며 “그러나 대학원 진학하는 탈북 청년들이 많이 늘어나는 상황인데 대학원부터는 등록금이 하나도 지원이 안 돼 등록금 마련이 막막한 상황”이라고 했다. 또한 취업과 관련해서도 “(법학전문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면서 남한 친구의) 자기소개서를 보니까 (다양한 활동에) 굉장히 놀랐다”고 했다. 그런 뒤 “취업 준비하는 주변의 탈북자 형ㆍ누나들이 있는데 모두 취업을 힘들어 한다”며 “물론 대한민국 청년들이 모두 취업이 어렵지만 (탈북 학생에게도)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맞지 않다"고 말했다."출발이 다르기 때문”이란 이유를 달았다.

채진아씨는 부모가 탈북자이지만 북한이 아닌 중국 등 제3국에서 태어나 지원을 받을 수 없어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중도입국자녀의 문제를 거론했다. 정부는 중도입국자녀의 경우 한국에서 태어난 탈북이탈주민 자녀와의 형평성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이들에 대해선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고 있다. 채씨는 “아이가 제3국에서 태어나면 정착지원을 못 받는데, 탈북 부모가 일반 부모와 똑같이 수업료를 내줄 수 있느냐가 문제”라며 “중도입국자녀는 경제적인 문제뿐 아니라 정서적인 문제도 심각하다”고 말했다.그는 현재 통일부 통일교육원에서 전문강사로 일하고 있다.
채씨는 정착 지원 프로그램의 잘못도 꼬집었다. 그는 “충남 천안·아산·예산·당진에 탈북자가 700명 정도 있는데 3명의 상담사가 이들을 관리한다”며 “상담사가 아니라 행정업무를 하는 전달사 역할에 그친다. 재입북하거나 자살하는 등 불명예스러운 일이 생기는데도 손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이 28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국민대통합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북한이탈주민 청책(聽策) 간담회’ 에 참석해 탈북자들의 고충과 애로사항을 듣고 개선책 마련을 약속했다 . [대통합위 제공]

간판제작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노현정씨는 “40ㆍ50대 탈북자는 어디 가서 취직할 데가 없어서 자영업을 많이 하려고 한다.하지만 동네에서 탈북자가 운영하는 곳이라고 알려지면 손님이 안 온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다문화가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원제도가 갖춰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지적했다. 노씨는 “다문화가정 주부는 운전면허학원에 가면 공짜로 교육받을 수 있다고 해서 구청에 물어보니 담당자가 탈북자는 안 된다고 하더라”며 “다문화가정 주부는 가족이라도 있는데 탈북자는 가족도 없고 집에 가면 낡은 TV 밖에 반겨주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참석자는 “결혼을 하면 기초생활 수급이 끊길 수 있기 때문에 탈북 여성은 결혼을 해도 혼인신고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아이를 아빠 호적에 못 올리고 엄마에게 올리게 된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탈북자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한 대통합위는 올 상반기 내에 탈북자 지원을 위한 정책을 만들어 박근혜 대통령에게 제안하기로 했다.한광옥 위원장은 “대통령께서 기자회견에서 강조했듯이 현재는 남북통일을 위해서 역량을 집중하고 실질적 통일을 위해서 한걸음 한걸음 나가야 할 때”라며 “통일 실현의 가장 밑바탕이자 초석이 되는 게 국민대통합”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남남갈등을 우선 해결하고 우리 역량을 모은다면 통일은 어느 때인가는 현실이 될 것”이라며 “북한이탈주민이 우리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되면 남북통일은 좀 더 앞당겨질 수 있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한광옥 위원장과 유중근(대한적십자사 총재)ㆍ홍순경(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대통합위원, 북한이탈주민 등 17명이 참석했다.

허진 기자 b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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