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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피폭자의 보상 책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타인에게 입힌 피해를 보상하는 문제에 있어, 법률적 또는 형식적인 책임을 이행했다 하여 그로써 모든 것이 끝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가해자 대 피해자의 관계에 있어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도의적인 양심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문제는 비단 개인 대 개인 사이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국가 대 개인 또는 국가 대 국가 사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비근한 실례로, 부주의한 운전으로 타인을 불구자로 만든 운전사가 형사상의 책임을 지고, 법률상의 보상 요건을 충족시켰다해서 그 도의적 책임마저 모두 면제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공무 집행 중의 공무원이 중대한 과실 또는 명백한 불법 행위를 통해 선량한 국민에게 신체상 또는 재산상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입혔을 경우, 그 법적 보상 절차를 취했다거나, 형식적으로 입에 바른 진사의 뜻을 표했다하여 그 도의적 책임이 무로 돌아간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서는 이 당연한 도의적 양심의 문제가 너무도 등한시되고 있으며, 그 중에도 특히 사회적으로 강자의 위치에 있는 가해자일수록, 약자인 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에 있어 도의적 책임 관념이 희박하고, 그들로써 능히 할 수 있는 물질적·금전적 보상에 있어서마저 인색하기 이를데 없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통례임은 통탄할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오늘날 한국 국민들은 전혀 뜻밖의 횡액을 당하여 목숨을 잃고서도 그 피해 보상의 범위가 고작 기백만원을 넘지 못하고, 공무원 등에 의한 가해 행위로 마땅히 국가가 책임져야 할 불구 폐질자들 마저 사실상 노두에 방치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국가 재정상의 형편 등만 부득이한 면도 없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시해야 할 것은 선의의 국민의 피해 보상 문제에 대해 역대 위정자가 이토록 무관심을 지속해 온 것은 다름 아닌 도의적 책임감의 마비 때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사실이다.
최근 또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사할린」 교포들의 환국 촉진 문제, 일제 때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한국인 징용자 중 원폭의 피해를 받아 사망했거나 현재까지 신음하고 있는 이른바 피폭자들의 치료와 유족 보상금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도 먼저 제고되어야 할 것은 우리 정부와 일본 정부 당국자들의 이것은 도의적 책임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얼마 전 일본 복강 지방 재판소는 일본으로 밀항하여, 그들의 국내법인 원폭 의료법의 적용을 받을 권리를 청구한 한국인 피폭자 손진두씨의 제소에 대해 그 정당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현재 한국인으로서 알려진 생존 피폭자 9천3백62명 (한국 원폭 피해자 원호 협회 등록자)을 포함, 총수 2만명에 대한 일본에서의 치료 가능성에 서광이 비치고 있다.
한·일 양국의 정부 「레벌」에서는 이들의 피해 보상 문제도 이미 체결된 청구권 협정으로써 법적, 또는 조약상으로는 완결된 문제라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로써도 결코 끝날 수 없는 도의상·양심상의 책임 문제를 전기한 복강지재의 사법관들은 사법의 정의감에 호소하여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할린」 교포의 귀국과 그에 따르는 생활 보상의 문제, 또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치료와 그 피해 보상 문제 등은 한·일 양국 정부간에는 법적·조약상으로 일단 그 책임 소재가 분명히 완결된 문제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국가간에 있어서도 그들의 불법 행위와 중대한 과실로 인하여 선량한 국민들에 입힌 씻을 수 없는 피해를 보상하는 문제는 그 국가의 높은 도의적 책임관을 전제로 할 때에야만 비로소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찾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먼저 국민의 정당한 권리를 신장·보호하는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 당국자의 도덕적 각성을 촉구하는 동시에 그러한 도의적 차원에서 일본측과의 새로운 대화의 「채늘」을 열게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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