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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그 전설·도명을 밝힌다(제자=김홍일)|제1장 김성주의 소년시절|중공당서 외면된 이종락 일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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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30년 한해 사이에 만주에 있는 한인의 공산주의조직은 모두 중국 공산당에 흡수됐다. 그러나 김성주가 끼어있던 이종락 일당은 중공당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주변에서 서성댔다.
중공당 만주성위가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에 따라 재만 한인 공산주의자 조직과 운동을 흡수하게 된 전말은 당시의 이종락과 김성주 평가에 시사하는바 크다.
1921년7월 상해에서 조직된 중국 공산당의 만주진출은 1926년7월에 있었던 중공당 대련지방위원회의 성립에서 비롯한다. 넓은 만주 땅의 구석진 일각 대련에 거점을 확보한 중공당 조직은 1928년에 이르러서는 만주의 심장부 봉천에 중공당 만주성위를 설치했는데 이로써 중공당은 본격적으로 전 만에 걸친 운동을 지휘, 전개하게된다.

<재만 한인들 공산조직 가담>
이에 앞선 만주의 공산주의운동은 이주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한인들의 독점물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운동의 실패를 겪었고 태평양회의에 걸었던 기대마저 무너지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소련의 피압박민족해방 슬로건에 기울었고 민족혁명(독립)과 사회혁명(계급의 타파)의 동시수행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소련의 후원을 얻기 위해서도 본의든 아니든 간에 「소비에트의 옹호」「무산자혁명」등을 부르짖으면서 공산주의조직에 가담했다.
이와 같은 추세는 재만 한인사회에 영향을 주었다. 대부분이 농민인 이주 한인들은 나라를 빼앗긴 유랑민 같은 처지인데다가 그 사회적·경제적 생활조건이 좋지 않아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의 동시수행이라는 구호는 귀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혁명적 구호를 앞세우는 청년동맹 또는 농민동맹조직에 가입했고 그러한 운동을 통해 「약소민족의 조국」 소련과 연계됨으로써 고국의 광복도 빨라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편 서울의 조선 공산당은 몇 차례의 검거선풍에도 불구하고 다시 재건되는 끈기를 보였으나 중앙부를 둘러싼 것이었을 뿐 지방조직에 이르러서는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조공당 만주총국은 각파별로 각기 지역에다 각기의 총국을 조직할 수 있을 정도로 저변이 있었다. 중공당 만주성위가 성립되어 전 만에 걸친 조직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자 한중 공산주의운동의 전면접선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중공당 만주성위가 성립된 1928년은 한인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불행의 해였다. 그해 7∼10월 사이 조선 공산당 제4차당이 붕괴되었고 12월엔 코민테른이 한국의 공산당의 사실상 붕괴를 확인하는 결정서를 발표하고야 만 것이다. 코민테른의 「12월 테제」라 불린다.
당의 붕괴를 확인한다는 것은 승인할만한 당 조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코민테른의 지부로 승인되었던 조공당의 그 승인이 취소되었다는 뜻이다 (「12월 테제」는 당의 재조직을 위해 파쟁의 지양 등 몇가지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공산주의운동을 적발해내는데 비장했던 일제경찰 때문에 8·15해방까지 당 재건은 못했다).
조공당이 코민테른의 승인을 잃어 그 만주조직은 정신적 지주와 동시에 조직의 지휘탑을 잃은 셈이다. 그 결과 한인의 공산당 조직은 중공당 조직과 접촉하게되었는데 중공당 만주성위는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심한 파벌성과 이미 다져진 조직기반을 잘 알고있었다. 양자 통합의 필요성은 양측에 함께 있었다.

<중공당이 사주한 폭동노선>
1930년3월에 남만에 부동의 지반을 잡고있던 조공당 ML파의 만주총국이 해체선언을 내고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을 내세워 중공당 만주성위에의 개별적 입당을 밝히자 재만 한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에는 분분한 논란이 있었으나 그해 말까지는 대부분이 중공당에 가입하고 말았다. 그 이래 만주에는 한인의 독자적인 공산주의조직은 있을 수 없었다. 만주에 있어서의 한인 공산주의운동은 중공당의 지휘하에 들어가고 조선 공산당원으로서가 아니라 중공당원으로 있게된 것이다.
중공당 만주성위는 특히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파벌성을 경계해서 개인적 입당만 허락했을 뿐 아니라 엄격한 심사를 거치게 했다. 그 입당조건의 하나가 「혁명적인 당성의 발휘」였으니 유명한 1930년의 5·30간도폭동사건이 그래서 일어난 것이다.
당시 중공당은 「이입삼 코스」라 알려진 무장폭동노선으로 달리고 있을 때이다. 무장폭동으로 지방 소비에트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전국적 혁명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는 이 중공당 중앙의 이입삼 코스에 따라 만주성위도 무장폭동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는데 한인을 빼면 거의 조직기반이 없다시피 한 만주성위는 한인들에게 무장폭동에의 참가를 입당허가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고 따라서 공산주의 조직도 그만큼 컸던 간도에서 불길이 제일 먼저 올랐다. 간도지방의 주요도시인 용정주민의 대부분이 한인인 이 용정에서 파괴와 방화와 살상의 생지옥이 벌어졌다. 1930년5월30일 밤의 일이다. 폭동은 인근 지방으로 파급됐다. 『객관적 혁명정세는 완전히 성숙했다. 지금은 혁명 전야이다. 대담하게 발동하면 천천만만의 대중이 궐기한다』-이것이 중공당의 사주로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에 뛰어들 때의 모토였다.

<공산폭동에 2천 한인 참가>
5·30 폭동사건은 8·1 교화폭동사건으로 이어지고 그와 같은 폭동들이 그해 11월말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일련의 사건들은11월 이입삼이 비판을 받고 그 노선이 청산되는 중공당 중앙의 결정이 없었더라도 그 이상은 계속될 수 없는 형편이었다. 2천명 이상의 한인들이 가담했던 이 폭동사건으로 7백여명이 검거되고 5백3명이 서울로 압송 기소되었으므로 후속부대가 없었다.
더우기 동북정권의 경찰이 일제경찰과 손을 잡고 탄압에 적극 나섰다.
중공당에의 입당을 원했던 사람들, 공산주의 신념을 과시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폭동에 참가했던 사람들, 그들의 대부분이 이 극좌위험주의 맹동노선의 폭동 때문에 잡히고 만 것이다. 그것은 한인 공산주의운동사상 초유·최대의 희생이었으며 동시에 중공당의 지시 하에 일어났던 초유·최대의 희생이기도하다.
그러나 이 대담하고도 대대적인 봉기는 그해 7월에 있었던 중국 남부 장사 함락에 나타난 중공군의 활동 등과 곁들여 만주의 한인농민들을 더욱 공산주의로 기울게 했다.

<재소한인들 더욱 공산화>
우리의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인 국민부가 좌우 양파로 완전히 잘라져 무력충돌까지 일으킨 것도 이때며 김성주의 두목 이종락이 국민부를 탈퇴하고 제멋대로 조선혁명군 지휘부란 것을 만들어 「소비에트의 건설」 「중공당 지도하의 지방폭동에의 참가」등을 표방한 것도 바로 이때이다. 그러나 이종락 일당은 중공당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시세에 부동하는 기회주의자로밖에 안보였기 때문이다.
중한 공산당의 통합시기에 김성주가 중공당의 인정을 못 받는 한 조그마한 좌경조직의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는 것은 김성주가 그 이전에 재만 한인 공산조직의 일원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그가 1927년에 공청에 가입했다느니, 또는 공청을 조직했다느니, 또는 1930년 전후해서 어디의 공청서기로 활약했다느니 하는 북쪽의 주장은 모두가 거짓이다. 【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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