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하게 유연하게 자신보다 음악을 더 사랑했던 거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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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호 06면

“클라우디오는 모차르트 각 교향곡의 구조적인 단위마다 힘을 균등하게 배분하려 했지요. 그러자 곡의 세부적인 묘사와 그 정서가 놀랍도록 자연스럽고, 마술처럼 자발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어요.”(바이올리니스트 줄리아노 카르미뇰라)

20일 타계한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

20일 오후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이 술렁였다.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향년 81세로 타계했다는 공식 보도에 전세계 클래식 음악팬들의 추모 멘션이 홍수를 이루기 시작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1933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첫 음악선생이었던 아버지 미켈란젤로 아바도는 베르디 음악원 교장을 지낸 이탈리아 최고의 바이올린 교육자였다. 베르디 음악원을 거친 아바도는 빈 국립음대에서 한스 스바로프스키에게 지휘를 배웠다. 6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빈 필을 지휘했고, 68년 고향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 지휘를 시작, 82년에는 라 스칼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설립해 수준을 크게 높였다. 79년부터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 83년에는 음악감독이 되었다.

아바도 시절 런던 심포니에 평론가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베토벤, 말러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고 동시대 음악에도 관심을 기울여 베르크, 쇤베르크, 베리오, 림의 음악을 소개했다. 바비컨 센터에서 ‘구스타프 말러와 20세기’를 비롯해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브리튼의 연작 음악회를 개최한 아바도는 메시앙, 슈니트케, 티펫 등 동시대 음악에도 열려 있었다. 아바도가 87년 런던 심포니에서 물러나자 많은 이가 서운해했다. 악단의 황금기를 구축하고 단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 시절에는 무소르그스키 ‘보리스 고두노프’ ‘호반시치나’, 슈베르트 ‘피에라브라스’ 등 자주 연주되지 않던 오페라를 다루며 레퍼토리를 늘렸다. 빈 필과의 공연도 잦아졌고, 91년 사임할 때까지 베토벤 교향곡 전집 등 수많은 음반을 녹음했다. 90년 마젤을 비롯한 다양한 유력한 지휘자들을 누르고 카라얀의 후임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이 되면서 아바도는 세계 최고의 지휘자로서 입지를 확고히 했다. 베를린 필에서 아바도는 단원들에게 “마에스트로 말고 클라우디오로 불러 달라”며 권위적이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오케스트라에 새 바람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그러나 20세기 음악을 전격 도입한 프로그램은 청중에게 환영받지 못했고, 제왕적인 카라얀 이후 갑자기 민주화를 맞이한 베를린 필과 아바도의 관계엔 혼선이 가중됐다. 2000년 위암으로 쓰러진 아바도는 이후 활동이 우려되었지만, 위 절제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해 지휘를 계속했다. 베를린 필 사임 당시 ‘지는 해’로 비유되던 아바도는 그 후 지휘 인생 후반에 인디안 서머같이 열기를 뿜으며 완성도 높고 깊어진 음악성을 보여 주었다.

2003년부터 자신이 조직한 오케스트라와 활발히 활동했다. 이 중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세계 최고의 솔로이스트와 수석단원들로 구성된 올스타 오케스트라였다. 아바도는 이들과 혼신의 힘을 다해 말러 교향곡 2번 등에서 역주를 펼쳤다. 볼로냐에 기반을 둔 오케스트라 모차르트는 바흐의 협주곡과 모차르트 교향곡 등에서 생기 있는 템포와 자연스러운 흐름이 귀에 착착 감기는 연주를 선보였다. 원전 연주와 현대 악기 연주 간의 절충과 혼합의 양상을 반영하며 젊은 연주자 못지않은 유연함을 보여주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아바도가 조금 늦게 세상에 등장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베를린 필 전임자 카라얀의 그림자를 지우기에 버거웠을, 20세기 이후 음악에 대한 거부감이 지금보다 훨씬 더 컸을 때 동시대 음악을 연주했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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