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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겸손이 참다운 행동의 바탕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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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호 26면

일러스트 강일구

감정을 과장하고 생각을 비틀어서 주의를 끄는 것이 시(詩)고 글쓰기라는 것이 오늘의 통념이다. 이런 조작적인 글쓰기의 병폐의 하나는 글에서는 물론 삶의 현실에서도 참과 거짓의 혼재를 당연한 것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심하지는 않지만, 감정화된 글의 허위성은 다른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었다. 20세기 영미문학에서 시나 소설의 표현을 될 수 있는 대로 객관적인 언어로 돌려놓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것은 비슷한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빠른 삶 느린 생각 생각의 여러 겹에 대하여 <1> 요동하는 지구 속의 삶

김종길 선생은 영문학자이면서 우리 전통에서의 절제의 문화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는 시인이다. 최근에 발표된 선생의 시에 ‘아, 지구여!’라는 것이 있는데(현대문학 2014년 1월호), 이것은 오늘과 같은 세계화 시대에서 매일매일 접하는 재난의 뉴스 몇 가지를 별 다른 수식이 없이 요약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태풍 하이옌이 휩쓸고 간 필리핀의 마을.

지난 가을에는 태풍 하이옌이
필리핀 중부 타클로반 일대에서만
7000명이 넘는 인명을 앗아 가더니

이렇게 시작하여, ‘아, 지구여!’는 초겨울에 접어들면서 인도네시아 시나붕 화산이 폭발하여 뿜어낸 재가 8000m 상공에까지 이르고, 시칠리아의 에트나 화산은 금년 들어 열일곱 번이나 화산재를 뿜어냈다는 뉴스에 언급한다. 이런 재난들을 열거한 다음, 시는

동서양 할 것 없이
이 지구덩이가 지금
무슨 발광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이러한 물음으로 끝난다. 그 이상의 감정 표현이나 평석은 첨가되어 있지 않다. 마지막 부분에서 말해지듯이, 시에 열거된 재난은 동에서 서까지, 즉 필리핀에서 시칠리아에 이르고, 시간적으로는 지난 가을부터 금년 초까지 연속해서 일어났으니 불안의 요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에 언급된 것 이외에도 들려오는 천재지변은 끊임이 없다. 이 며칠 사이에도 뉴스는 미국의 북동부와 캐나다 동부 지방의 온도가 영하 50도 이하로 내려갔다는 것을 전했다. 어떤 곳은 전기가 끊어지고, 동사자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날씨 상황과 관련해 특이한 이야기는 미국의 시카고나 인디애나에서 이 혹독한 한파에 대비해 노숙자들을 수용했으나, 그것을 거부해 동사한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노숙자는 다른 때도 합숙소 이용을 기피했다고 한다. 사람의 성미의 특이함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번 북미 대륙을 강타한 바와 같은 한파는 그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 일은 수십 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이러한 냉동기후는 북극 근처에서 지구 회전방향과 반대로 도는 냉기류 회오리로 인한 것인데, 이 회오리가 지구온난화로 인해 남하한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최근의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한 지역에서 큰 호수들의 물이 점점 차올라서 바나나·유카 농장들이 없어져 간다는 것이 특별 뉴스가 되었다. 도미니카와 아이티의 경계 지역에는 여러 개의 호수가 있는데, 그중에 가장 큰 호수가 엔리키요 호이다. 근년에 수면이 높아지면서 엔리키요 호는 그전 크기의 두 배, 135평방마일로 넓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주변의 바나나유카망고 농장들이 물에 잠기게 되고, 정부에서는 호변의 촌락들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일 자체가 비극이라고 하겠지만, 뉴욕타임스의 보도는 여기에 관련된 개인적 비극을 전한다. 호세 요아킨 디아즈의 동생 빅토르는 해외에서 노동하다가 옛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돌아와보니 할아버지의 농지가 물에 잠기고, 소들이 풀을 뜯던 들이 물고기가 헤엄을 치는 호수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러한 변화를 참아 그대로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빅토르의 반응을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마음에 큰 충격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일일 것이고, 그 충격은 고향의 상실에 관계된 것이었을 것이다. 이 고향은 해외 노동자의 고달프고 고독한 생활에서 한없이 아름답고 정스러운 것으로 비쳤을 터인데, 그 꿈의 고향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엔리키요 호수의 수면이 넓어지는 데는 여러 원인이 있을 것으로 말하여진다. 그 하나는 물을 흡수할 수 있는 삼림을 남벌한 것이다. 평균 온도가 낮아져서 호수 물의 증발양이 줄어든 것도 여기에 관계된다고 한다. 다른 또 하나의 설명은 강우량이 평균보다 크게 불어난 것인데, 지구 전체의 기후변화가 그 원인이라고 한다.

이러한 재난의 뉴스들은 인간에게 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엔리키요 호수 지대의 변화가 궁극적으로 기후변화에 있다고 한다면, 다른 원인들도 있기는 하지만, 결국 그것은 사람의 잘못 탓이 되고 그에 대해 사람들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탄소 가스 배출을 비롯해 여러 공기 오염에 대한 국가적인, 그리고 국제적인 대책은 지지부진한 상태에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사람이 사람의 일을 경영하는 것이 신뢰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다는 것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많은 천재지변은 사람의 경영 능력을 넘어가는 일이다. 무엇이든 생각대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 능력에 대한 과신의 결과다. 이러한 재난들의 소식을 들으면, 사람의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가냘픈 잎사귀를 타고 거대한 물 위로 떠내려가는 것과 같은 것이 인간 존재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김종길 선생의 시에 언급된 재난들은 태고 적으로부터 사람이 견디어야 했던 인간 조건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다만 매체의 발달이 그것이 인간 생존의 엄숙한 조건이 아니라 뉴스거리가 되게 하는 것일 것이다(뉴스는 많은 일을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크게 보이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항다반사가 되게 한다).

지난해 다시 분출한 이탈리아 에트나 화산.

김종길 선생의 시는 에트나 화산의 폭발을 말하고 있지만, 화산 폭발은 예나 지금이나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에트나 산만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화산 폭발 가운데에도 가장 유명한 것은 서기 79년에 있었던 베수비오 산의 폭발로, 그때 폼페이는 완전히 화산재에 덮이고 시민은 몰살되었다. 20세기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의 시 ‘악의 미학’은 79년의 베수비오 산 폭발을 경험하고 그것을 기록한 플리니우스의 편지를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시가 화산 폭발과 같은 재난에 대한 본격적인 성찰을 담은 것은 아니다. 그는 사람이 경험하지 않을 수 없는 악의 존재가 삶 전체를 긍정하는 데에 비극적이면서도 불가피한, 그리고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스티븐스의 그러한 주장은 인간사를 이데올로기적 계획에 따라 간단히 개혁할 수 있다는 생각을 경계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스티븐스의 생각에 비해 아마 화산 폭발은 보다 엄숙한 존재론적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두려움은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생태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자연에서 느끼는 두려움이나,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엄청난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으로 하여금 윤리적 책임을 떠맡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 연속선상에서 베수비오 또는 에트나 화산과 같은 산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생명이 주는 복합적인 외포감(畏怖感)을 표현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서양문학에는 에트나 산을 말한 작품이 많지만, 그 화구에 투신하여 자살한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횔덜린이나 매슈 아널드의 시에서 화산의 불꽃은 정신과 생명의 힘에 일치하는 것으로 말하여진다.

자연의 큰 재난을 삶의 조건으로 말하는 것은 숙명론에 굴복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위에 든 여러 재난의 원인은 기후변화에 있다고 한다. 이 변화에 인간의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필요한 것은 대책을 강구하는 적극적 행동이다. 그러나 천재지변과 관련해 생각할 수 있는 두 가지 태도, 인간의 운명의 신비에 대한 외포감과 행동적 대책 사이에 반드시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요나스의 유명한 말에 “당신의 행동의 결과가 진정한 인간의 생명의 영속성에 어긋나지 않도록 행동하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칸트의 지상명령의 공식에 따라 생명 윤리를 규정하고자 한 것이다.

두려움, 외경심 또는 존중은 참다운 행동의 바탕이다. 거기서 행동에 대한 책임의 원리가 생겨난다(『책임 원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요나스의 중요 저서다). 그것을 반드시 탓할 수만은 없지만, 경제와 정치 발전은 모든 것이 간단한 창의적 발상으로 조정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일반화한다. 그러나 심각한 인간 행동은, 다시 한번 요나스의 말을 빌려 ‘생명에 대한 경외감’에 기초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이렇게 여러 층위 위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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