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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미 경제학 교수 「헤일브로너」의 신저 발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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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의 경우 1930년대에서 1970년대로의 경제 변화는 1인당 개인 소득을 2배로 늘렸지만 인종 분쟁·청소년 범죄·도시 생활의 타락 같은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에토스는 개인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의 약점을 노출시켰다. 풍요는 도덕적 타락을 막지 못하고 수많은 인간들의 실존적 불행만을 재촉하는 것이다.

<체제 상관없이 혼란>
사회주의 경제 체제 역시 이런 점에선 성공적이 아니다. 사회주의 경제 체제의 사회적 혼란이 자본주의 사회보다 정도가 덜하다고 해도 그것은 사회주의 국가의 경찰의 힘 때문이다. 산업 사회 주의의 경제적 성공도 보편적인 행복을 제공하지는 못했다는 이야기다. 자본주의 및 사회주의 경제는 모두 과학기술과 기계문명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행복을 가져오지 못했다.
자본주의의 세력 확장의 원동력은 지배계급의 동물 정신만이 아니라 기업들의 자기 성장의 압력에서, 그리고 시장의 큰 몫을 차지하려는 기업들의 본능적인 야심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해결 방법은 일본의 자본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개인 자본주의로부터의 국가 자본주의로의 이행이다.
그렇게 되면 정체적인 자본주의가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계획된 국가 자본주의에서는 팽창이 반드시 필요 불가결하지는 않다.
정체된 자본주의에서는 소득 분배라는 폭발성을 가진 문제가 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정부 사업·예술 활동 같이 자원 소비와 인조열의 방출이 적은 분야를 확대하는 것으로 해결 가능하다.
앞서 말한 인간 개조로의 전환은 대의 민주주의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어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탁월한 지도자를 만나고 국민들이 적극 호응하여 민주제도를 희생하지 않고 구조 변화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자본주의 사회의 정부는 구조 개혁이 빚을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해결하는데 독재적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의 정부가 취할 조처 중에는 기업의 국가 경영과 소득 수준의 비시장적 결정이 반드시 포함된다는 점에서 전환의 방향은 고전적인 혁명의 시나리오와는 크게 다르지만 사회주의를 향한 이행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는 훨씬 용이하게 산업사회를 정체적인 균형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후진국들 성장 고집>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사회주의 사회도 정치적으로 수락할 만한 소득 분배를 성취시켜야 한다는 문제가 남는다. 실질적인 생산고가 줄어드는 경제에서 소득 분배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와 같은 투쟁이 따를 것이고 그럴 경우 정부가 발동하는 강제력은 자본주의 독재 정부의 조치와 다를 바가 없다.
지금의 산업 성장의 속도대로 라면 인조열의 방출량은 앞으로 3세대 내지 4세대 안에 위험 수준에 이른다.
따라서 사회주의 체제고 자본주의 체제고 간에 그것들의 바탕이 된 생산 양식을 포기해야 하고 공업 생산의 확대 대신 조심스러운 제한은, 낭비 대신 절약을 장려해야 한다.
후진국 중에서 공업 성장을 선뜻 제한할 나라는 아직 없고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선진국들은 정체적인 사회경제 구조를 갖는데 필요할 만큼의 변화를 아직 상상하지 못한다. 초국가적 이익을 위해서 국가 이익을 희생시킬 사회주의 국가도 없다.
앞으로 강력한 정치적인 힘이 행사되는 경향은 불안의 시대가 주는 심리적인 압박으로 한층 강화될 것이다.
인간의 의식적인 선택에 의한 변화보다는 외적 사정에 의한 변화, 계산에 의한 변화보다는 재난에 의한 변화의 전망이 한층 분명하다.
후진국은 자본축적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국민의 교육과 활기에 역점을 두는 방향으로 발전의 정의를 재조정하고 선진국은 공업 생산의 낭비를 줄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민족국가로부터 고대 그리스가 실현한 폴리스로 역사의 방향을 재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미래는 아직은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도 아니고 마지막날을 향해서 걸어가는 운명도 아니다. 도전은 극복될 수 있다. 우리의 운명은 사형 선고라기보다는 종신형으로 보는 게 좋겠다. 살인 기술과 불쾌한 생활양식, 그리고 위험한 기술 문명을 포기하는 것이 도전을 이겨내는 장기적 해결이다.
현대인간의 활동의 원동력은 프로메테우스의 정신에서 나왔다. 프로메테우스 정신의 어떤 요소는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의 형태와는 조화를 이룰 수 없다. 프로메테우스는 절망의 시선뿐 아니라 분노의 시선을 가지고 자신이 초래한 종말을 응시한다.

<극복 가능한 도전>
그렇게 숱한 노력 끝에 성취되는 것이 그렇게 적다면, 그리고 그렇게 엄청난 도전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적다면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은 모든 것을 체념, 인류로 하여금 마땅히 받을 고통을 받게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거울로 삼을 또 다른 신화의 인물은 아틀라스이다. 정복의 정신과 야망은 인류의 구제를 돕지 못한다. 불굴의 투지를 가지고 천체를 떠받들고 있는 아틀라스같이 결연히 스스로의 짐을 짊어지는 정신이 필요하다.
우리들의 내면에 있는 아틀라스 정신이 비틀거리면 인류를 구제하려는 결단은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아틀라스 그는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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