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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순노부부 「고독의 자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6남매의 자식까지 둔 할아버지·할머니가 고독을 되씹다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부부 슬하에는 4남2녀와 손자·손녀 13명, 중손 3명이나 되어 얼핏 다복하게 보였겠지만 자신들은 『우리가 빨리 죽어야 너희들이 편하겠다』고 생각끝에 저승으로 앞서갔다.
지난달 29일 낮12시30분쯤 서울도봉산기슭 양지바른언덕 소나무아래에 박원식씨(82·경기도파주군천현면법환리94)와 부인 공선동씨(73)부부가 극약을 마시고 나란히 자살한 시체로 발견됐다.
두노부부는 옷을 깨끗이빨아 입은채 죽어있었으며 곁에는 생전에 애용한듯한 지팡이 두자루와 낡은 증절모 1개, 속옷10여벌이든 손가방 1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자살한 박씨의 고향은 전남함평군나산면나산리. 56년전 고향에서 공씨와 결혼, 맏아들 D씨(52·법원리)등 4남2녀와 손자·손녀 13명, 증손3명을 두었다.
세째아들 N씨(40·전남광산군송정읍·농업)에 따르면 박씨의 성품은 지나칠이만큼 완고하고 꼬장꼬장해 비록 굶는한이 있더라도 어느 누구의 도움도 싫어했다는것. 얼마안되는 땅이지만 자기손으로 직접 일구어 자녀들을 열심히 키웠고 살림을 내주고 시집을 보냈다.
박씨부부는 세째에 이어 네째아들을 대학에 보내 졸업시키고 14년전 마지막으로 장가를 보내면서 큰기쁨을 느꼈다. 비록 호위호식한번 해보지 못했지만 남들 못지않게 자식들을 키워 제기을 가도록 했으니 부모로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 것. 『이제 7순에 접어들어 남은 여생을 편히보내리라.』박씨는 그동안 아끼고 아끼던 20여마지기의 땅과 집을 팜아 6남매에게 골고루 나누어준 뒤 장남인 D씨집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12년전 장남이 가정불화로 본처인 이연임씨(46)를 내쫓고 이모씨(53)를 후처로 맞아들이면서 박씨의 노후의 꿈은 깨어졌다. 이씨는 시부모에게『하고 많은 자식중에 왜 우리에게만 와있어 살림을 축내느냐』며 구박했다는 것.
이때부터 박씨부부는 장녀와 2남, 3남이 사는 전라도 지방, 차녀가 사는 충북 단양, 4남이 사는 강릉등을 돌며 자식들에게 얻어먹는 신세가 되었다. 한군데에서 1주일∼보름씩 묵고 다른 곳으로 옮기곤 했다. 노부부에게는 「팔도강산」이라는 묘한 별명이 붙었다.
그러다가 8년전 2남이 농약을 잘못마셔 사망하고 6년전에는 장남이 위암과 악성빈헐로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하자 박씨부부는 크나큰 상심을했다. 오갈데없는 신세에 자식들의 슬픈꼴을 보고는 『하루빨리 죽는것이 상팔자』라는 생각을 하게됐다.
박씨부부는 자살하기 이틀전인 3월26일 네째가 사는 강릉에서 옷보따리 하나만 들고 법원리 장남집을 찾았다. 그러나 아들은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고 누구하나 노부부를 따뜻이 대하지 않았다.
할수 없이 두노인은 28일저넉 『강릉으로 다시 간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러나 여지껏 신세를져온 네째에게 죽어도 다시 갈수는 없는 노릇. 두노인은 서울로 들어오다 도봉동에서 내려 양지바른 비탈을 골라 얼마남지도 않았을 여생을 스스로 청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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