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클로반, 멈추지 않은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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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오전 필리핀 타클로반(레이테주의 주도)에 있는 페리시 성당.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우산도 쓰지 않은 라몬 파마니안(60)은 촛불을 켜기 위해 성냥을 그었다. 하지만 습기 먹은 성냥에선 쉽게 불꽃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가 성당 내 묘지를 찾은 것은 지난해 11월 8일 초대형 태풍 하이옌으로 잃은 아내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그는 하이옌이 덮친 그날 47년을 함께 산 아내와 이별했다. 라몬은 “아내와 함께 대피소로 피신했는데 지붕이 강풍에 날아가고 곧바로 4m 높이의 해일이 밀어닥쳤다”며 “2층으로 함께 뛰어올라 가다 그만 아내의 손을 놓쳐 버렸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에 따르면 그날 그 대피소에서만 24명이 목숨을 잃었다.

 6166명 사망, 1785명 실종. 하이옌은 최고 시속 380㎞의 강풍과 15m 높이의 해일을 몰고 와 타클로반을 초토화했다.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실종자 가족들은 시신을 찾아 헤매고 있다. 피해 복구도 더디기만 하다. 해가 떨어지면 도시는 암흑세계로 바뀐다. 전기 공급이 이뤄지지 않아서다. 성한 건물이나 주택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집을 수리하려 해도 건축자재가 없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주민 대부분은 유엔이 구호품으로 나눠 준 방수포에 의지해 잠을 청한다. 이마저 부족해 일부는 시신을 덮었던 방수포를 이용해 비바람을 막고 있다.

피해 복구 진척 없어 움막서 생활

부인과 자녀 3명, 손주 1명을 잃은 힐라리오 보코(64)는 방수포로 만든 움막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태풍이 덮칠 당시 도망갈 틈도 없었다. 해일로 인해 이웃 주민 51명이 한꺼번에 수장됐다”며 한숨을 쉬었다. 로레나 아드빈쿨라(26)는 “안전한 곳으로 이사하고 싶지만 손바닥만 한 땅도 없는 처지라 어렵다”며 “태풍이 오면 잠시 피했다가 다시 움막으로 돌아와야 할 상황”이라고 체념한 듯 말했다.

 목숨을 겨우 건진 주민들은 생계가 막막하다. 농사를 모두 망쳤기 때문이다. 9세 소녀 크리시 엘리아스의 아빠는 남의 논을 빌려 벼농사를 짓다 피해를 봤다. 쌀 한 톨 건질 수 없게 됐다. 이 지역에서 활발했던 코코넛 농사도 당분간 불가능하다. 뿌리째 뽑혀 버린 코코넛나무를 다시 심어 열매와 기름을 얻으려면 최소 5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코코넛 열매를 팔던 제네비에브 로아(26)는 팅허브 초등학교에서 임시 교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태풍 이전에 우린 행복했지만 지금은 아이들이 비만 오면 탁자 밑에 숨어 운다”고 말했다.

 필리핀 보건 당국이 현재 가장 우려하는 건 전염병이다. 현장에는 치워지지 않은 쓰레기 더미가 악취를 내뿜으며 썩어 가고 있다. 파리와 모기 등 해충도 들끓고 있다. 주민들은 고온다습한 기후로 인해 언제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창궐할지 불안하다.

 세이브더칠드런이 파견한 의료진은 14일 카바쿤간 마을에 이동 보건소를 차렸다. 아날리에 카부도이(27)는 2세짜리 아들이 5일째 기침을 한다며 불안해했다. 초등학교 교사 콘수엘로 히나이(40)는 “아이들이 피부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연고나 항생제가 부족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다시 문 연 학교들 “교육이 희망”

 하지만 절망의 땅 타클로반에도 희망은 싹트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지난 6일 일제히 학교 문을 다시 열었다. ‘교육이 희망’이라며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 달라고 호소했다. 구호단체들도 교육장비를 지원했다. 그런데 학생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다. 오퐁 초등학교 엘리자베스 트리니다드(62) 교장은 “트라우마(심한 정신적 상처)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재민 400만 명 가운데 170만 명이 어린이다. 유엔은 구호단체들과 함께 1년간 7억9100만 달러를 아동 보호와 구호에 쓸 계획이다. 지난 13일 오르목 고등학교에서는 ‘유 레이즈 미 업’ 합창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타클로반(필리핀)=이정헌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가족들은 아직도 시신 찾아 헤매고 … 아이들은 비만 오면 숨는다
태풍 하이옌 그후 2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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