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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7)<제35화>「정치여성」반세기(17)박순천(제자 박순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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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부인회·부인신문>
신탁통치반대 궐기대회장에서 좌익계가 하도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우리는 「테러」의 위험을 느껴 대회가 끝난 후에도 교장실에 머물러 있었다. 그 자리에는 평소에 여성단체 모임에 잘나오지 않던 학교계통의 김활난·송금선·손정규·이숙종씨 등이 모두 참석해 있었는데 바로 이 자리에서 결성된 모임이 독립촉성 부인단이다. 단장에는 성격이 활발하고 말 잘하기로 이름났던 황기선씨가 선출되었다.
독립촉성 부인단은 그후 건국 부녀동맹에 대응하는 강력한 단체를 만들기 위해 한국 애국부인회와 통합하고 「독립촉성 애국부인회」로 재출발했다. 이때까지도 감투에는 모두들 욕심이 없어서 회장에 뽑힌 박승호는 안 한다고 울기까지 하며 끌을 내는 바람에 회장의 마음이 풀어질 매까지 두 달이나 부회장인 내가 회장 일을 대항해야만했다.
「부영선인」이란 꾜리표가 붙어 교사 허가도 받지 못했던 나는 해방이 되자 부교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여성단체 일이 바빠지자 46년말부터는 사실상 학교 일을 들보지 못했고, 타년에는 완전히 재단이사로 물러앉게 되었다. 정부가 수립되던 해인 48년2월 독립 촉성 애국부인회는 나라의 이름을 찾아 「대한 부인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나는 초대회장이 되었고 전국에 걸쳐 지부를 조직하느라고 눈코 뜰 새가 없었다. 한 달에 보름은 지방으로 돌아다녀야 했다.
특별한 자금이 있을 리 없었으므로 나는 늘 빈털터리였다.
그러나 빈 가방을 들고 시골에 내려가더라도 올라올 때는 가방이 그득했다. 부인네들이 몰래 돈도 넣어주고 옷이니 옷감이니를 사서 가득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해방 이후부터 내 옷을 내 손으로 사본 일이 없다. 내가 입고도.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나눠줘야 할만큼 늘 많은 옷감을 선물 받았기 때문이다.
무조건 나에게 일생을 두고 좋은 옷을 입혀준 수많은 여성들의 정성을 나는 잊은 적은 없으나 얼마나 보답했는가를 생각하면 괴로워진다.
나라를 찾아 모든 국민이 열성에 가득 차 있던 무렵이었으므로 여성단체활동도 기름에 불을 당긴 듯 맹렬하게 번져 갔다. 대한부인회는 누구에게 명령하거나 강요할 권리가 없는 민간단체에 불과했으나 누구도 그것을 마지는 사람은 없었다. 하자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했으니 여성운동 사상 그와 같은 특권을 누린 시절은 다시없을 것이다.
우리는 남북 통일이 될 때까지에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군·경원호와 계몽운동만 하기로 결정했다. 문자계몽은 물론 짧은치마와 개량적삼을 장려하는 등 생활계몽에도 앞장을 섰다.
부인회 파주 지부의 한 책임자는 길을 막고서 서 장보러 오는 부인네들에게 일일이 자기이름을 쓰게 한 후 쓸 줄 모르는 사람은 『배워 가지고 오라』고 되돌려 보낼 만큼 적극적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월권행위를 하기도 했다.
부인회의 생활계몽은 동난 후 부산에서까지 계속되었다. 김상돈 의원 같은 분은 우리의 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광복동네거리에서 「마이크」를 잡고 『「벨벳」치마와 유똥치마 입지 마라』고 언질까지 해주었다. 어린 여학생들도 자기엄마에게 「사치한 옷 안 입기」를 권장했으며, 어느새 이 운동은 사회적으로 반강제적인 성격을 띠어갔다.
이렇게 되자 평소에 좋은 옷을 많이 가지고 있던 여성들은 불평을 갖게되었고, 그 중 몇 명은 장택상 국무총리를 찾아가 청원까지 했다. 워낙 기세가 등등한 여성들이었기 때문에 장 총리는 그들을 꺾지 못하고 지금까지 있던 옷은 그대로 입어도 좋다』는 이례적인 담화를 내기에 이르렀다.
후에 정계로 들어가기는 했으나 여성운동에 일생을 바친다는 것은 나의 진정한 꿈이었다. 따지고 보면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여성운동을 좀 더 효과적으로 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정부가 수립되고 첫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을 때 우리는 동아일보 4층에 있던 여자 국민당 사무실에 모여 그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우리는 해방될 때까지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주장을 해왔으나 『여성이 과반수의 투표권을 갖고있으므로 우리도 후보를 내야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면 누가 후보가 될 것인가 의논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사람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에는 부인회일을 보다가 경찰로 들어갔던 황신숙씨와 내가 입후보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며칠 후에 보니 여성입후보자가 19명이나 되었다. 우리는 한 선거구에서 한 명씩만 나오기로. 약속했으나 서울중구에서는 2명이 되었다. 입후보만 하면 저절로 국회의원이 되는 줄 알았던 우리는 19명이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지고 말았다.
박승호와 친구 집에서 나오다가 오동 꽃이 길바닥에 떨어져있는 것을 보고 『꼭 우리 신세 같다』면서 한바탕 웃던 생각이 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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