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6)<제자 박순천>|<제35화>정치여생 반세기(16)-좌·우익이 대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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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유학시절 학생들의 대부분은 사회주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내가 속해있던 독서회에서도 공산주의 조직론 등을 자주 다루었었다. 우리는 일본과 싸우는 미국·소련을 함께 지지했으며 그것은 이들 열강이 우리나라의 독립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박렬 같은 사람은 자타가 인정하는 사회주의자였으나 독립을 성취하는 길에서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해방이 되어 20년 옥고에서 풀려난 그는 납북될 때까지 우리와 같이 일했던 것이다.
이제 독립이 되었으니 미국도 소련도 알 바가 없고 오직 우리나라의 재건이 있을 뿐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은 벌써 해방 며칠 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형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이미 동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환상을 버리고 빨리 인정해야만했다.
전국 부녀동맹은 『우리를 해방시켜준 것은 미국이다, 소련이다』하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논쟁에서 시작하여 점차로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름방학에 강연단을 조직해서 나와함께 일제하의 전국을 돌던 유영준과 학흥회의 중심 멤버였던 정칠성은 이제 완전히 우리의 반대편에 서게되었던 것이다. 정치라는 길에 나서면 가까웠던 친구도 멀어지고 멀어졌다가도 가까워진다는 것을 나는 그때 절감했다.
이렇게 부화가 싹트고 있을때 여순형씨가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는 9월6일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회라는 것을 소집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이 탄생되었다고 선포했다. 한 여름무더위가 고개를 숙이고 비가 몹시 내리던 날이었다.
그들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조각명단이란 것을 곳곳에 벽보로 써 붙었는데 전국인민위부에 김구 이승만 여지형씨 등 55명, 후보위원에 김준연 황태성씨 등 20명, 고문에 김창숙씨 등 12명이었다.
이 명단은 국내외 인사를 적당히 망라하였고 본인도 모르는 새에 들어가 있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해방 후 나는 학교 가는 길에 화신 앞에 붙은 벽보를 보고 인민공화국이란 것이 생긴 것을 알게되었다. 벽보를 보는 순간 내 마음은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해외임시정부의 요인들이 돌어온 후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정부수립을 논의하기로 약속이 되어있던 터에 이런 벽보가 나붙은 것은 인민공화국이 문제가 아니라 신의를 저버린 기습행위로 밖에 몰수 없었기 대문이다.
2,3일 후 그 인민공화국사무국이란 곳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13도를 순회하며 강연회를 하려고 하는데 여성연사가 필요하니 13명만 추천해 달라는 전화였다.
『인민공화국이 생겼으면 그 백성들을 보내지 왜 나한테 부탁을 하느냐』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이들이 순회강연을 다닌다면 우리도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래서 황신덕과 나는 서울역에서 문도 없는 기차를 타고 지방강연에 나서게 되었다. 밤새도록 달려 첫 목적지인 제천에 내린 우리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웃음을 터뜨렸었다.
터널이 많은 길을 문도 없는 차로 달렸더니 눈만 반짝반짝할 뿐 온 얼굴이 검둥이처럼 되어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도착하자 세수부터 하고 강연을 시작했다.
강연에서 돌아와 부녀동명사무실로 들어서자 정칠성은 『누구 허락을 받고 강연하러 갔었느냐』고 시비를 걸었다.
우리가 떠난 동안 서울운동장에서 여린 인민공화국수립 축하식에 나가 정칠성이 축사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우리는 『너는 누구 허락을 받고 축사를 했느냐』고 따져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이런 반목 속에서 유각경·박원경 등은 부녀동맹을 탈퇴하고 나가 한국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김활란·손정규·황기선 등이 독립구성부단 등을 조직했고 임영신은 여자국민당을 만들었다.
나와 황신덕은 끝까지 부녀동맹에 남아서 버티다가 12월8일 동아일보에 탈퇴성명을 내고 나와버렸다. 46년4월에는 독립도성부인단과 애국부인회가 하나로 통합되어 독립촉성애국부인회가 되었는데 박승호가 회장에 선출되고 황기선과 내가 부회장이 되었다.
그때 여자국민당은 인사동 입구의 한 교회에서 발기대회를 가졌었는데 교회로 임영신을 찾아간 나는 『여보, 우리 하나로 합치고 정당은 나중에 남자들과 함께 하지』라고 권했다.
임영신은 『말 말아, 내가 남자들을 잘 알아』라면서 고개를 흔들었는데 그후 남자들과 같이 정당을 하는 동안 나는 몇번이나 임영신의 그 말이 명언이었다고 느끼곤 했다.
좌·우익의 대립은 신탁통치반대투쟁에서 또 한번 불꽃을 튀겼다. 45년말 막부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 안이 발표되었을 때 이것을 반대하는데는 좌·우익의구별이 없었다.
전국민이 일제히 시위에 들어갔고 여성단체들은 46년1월2일 풍문여고에 모여 궐기대회를 갖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까지 반대투쟁을 함께 벌이던 좌익계의 여성들이 대회장에 몰려와 머리를 산발하고 울며 딩굴며 난동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룻밤새 소련의 지령을 받아 지지하는 촉으로 태도가 돌변했던 것이다. <계속> 【박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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