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등기마을의 고려동전 얘기|제3장 동북 지방의 한적문화 탐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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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여행길에 나선 나그네의 재미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낮선 이국 땅에서 꿈에도 생각조차 못했던 사람과 해후, 마치 수십 년 지기를 만난 것처럼 서로 회포를 풀 수 있는 즐거움 같은 것도 그 재미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일본 동북지방의 오지 「후지사끼」(등기)마을의 길목에서 우연히 만난 「오가사와라」옹(소립원심조·81·아호 유헌)과 더불어 함께 지낼 수 있었던 몇 시간의 기억도 여행의 이런 공덕 때문이다.

<소립원옹 취재에 변의>
팔호 기마타구 (본련재제10화) 취재차 홍전대학의 암강풍마교수댁 (홍전시취상조초전45) 에 들른 김에 기자가 미리 책에서 읽고간, 근처 「후지사끼」 마을의 고려 동전얘기를 꺼냈더니, 그는 전문외라는 겸손 때문에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그 대신 그는 손수 육삼현구육위에 장거리 전화를 걸어 문화재위원이라는 분을 소개해주었으나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그의 음성이 워낙 알아듣기 힘든 『「즈즈」변』 (동북지방 사투리·우리 나라 함경도 사투리처럼 타지방 사람들로선 좀처럼 알아듣기 힘들다)이라 답답증만 더했다. 하는 수 없이 암강교수는 직접 현장에 같이 가보자고 나서주었던 것인데 그 「후지사끼」마을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우연히 만난 것이 이 80노옹이었던 것이다.
소립원옹은 오래 전에 교장 직을 정년 퇴직한 노교사로서 지금은 한가하게 손자들이나 돌봐주면서 소일한다고 했으나 틈틈이 향토사의 연구에 골몰, 이 고장 사적이라면 무엇이든지 훤하게 꿰뚫고 있는 노인이다. 첫 대면인데도 어디서 여러 번 상면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몸집이나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하는 모습이, 문득 서울의 일석 이희승 선생을 연상케 한 것이다(선생께는 좀 실례일까). 작은 키지만 야무진 몸집, 80노구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정정하고 백오홍안에는 때때로 어린이 같은 미소가 꽃을 피운다.

<화전은 한 닢도 안 끼고>
원로 여기까지 취재차 왔다는 기자를 대하자 옹은 오랜만에 슬하에 돌아온 친손자를 대하듯 앞장서서 안내역을 맡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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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고려동전 얘기라는 것은 이 고장 「후지사끼」마을, 구안동성지에서 엄청난 수량의 홍무·영번전(14세기께에 주조된 명나라 동전)과 고려동전 등이 발굴됐다는 기사에서 비롯된다. 청삼시의 동오일보사에서 일찍이 학예부장파 논설위원을 지냈다는 하산준삼씨가 쓴 『「쓰가루」(진경)와 한인』이란 글에 실린 것인데 그 내용인즉 이렇다-.
『…청삼현홍전시에 인접한 「후지사끼」·「이따야나기」(판류) 마을 주변의 모래땅을 발굴하던 중 많은 수량의 「야요이」 (미생) 식토기와 【주=BC 1∼2세기께 일본 원시인들이 사용한 생활용구들. 주로 한반도에서 북구주방면에 전파하여 점차 일본전국에 퍼진 것으로 그 이전의 승문식 토기와 교대】 조선식 토기가 발견되었다. …또 이곳 「후지사끼」 마을의 분안동성지 근처에서는 구번시대에도 엄청난 수효의 홍무·영전전과 고려동전이 발굴됐는데 이상한 것은 그 안에 화전(일본동전)은 한장도 끼어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금정주편 『한래문화의 후형』 하권 P 286)

<발굴된 동전 행방 몰라>
소립원옹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고려동전의 행방은 지금 알 수 없지만, 실상 그에 관한 기록은 자기자신이 발견한 고문헌 『등기성지』에 실려 있던 거라고 풀이했다. 그리고선 그는 상고대 이래 이 고장과 한반도와의 깊은 연관성은 고사기·일본서기뿐만 아니라, 그 동안 계속 발굴되고 있는 고고학적인 여러 출토물들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그 현장들을 일일이 안내해 주겠다고 앞장섰다.
「후지사끼」마을 (행정상으로는 청삼현진경감등기정)은 지금 인구 약 1만 1천명의 조그마한 소읍. 청삼에서 「아끼다」(추전)로 통하는 국철 오우본선 천부역에서 서남쪽으로 약 4㎞, 홍전시로부터는 동북쪽 15㎞의 위치에 있다. 지금은 「쓰가루」 (진경) 평야의 한복판이지만, 상고시대에는 이 마을까지 수량 (수운)이 많은 천뢰석천·평천·암목천 등 3대 해양수로가 뚫려 바로 바다로 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찍부터 이 고장과 대륙, 즉 한국의 동해안 일대와 직접 뱃길이 트이고 있었다는 것도 알만한 일이다.
지금의 마을이름 「등기」도 고문헌에는 「연선」 또는 「연갑」이라 기록돼 있는데 이러한 기록들은 지금부터 1160여 년 전인 일본년호 홍인년대 (8l0∼824)때부터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이미 이 고장에는 상당히 규모가 큰 취락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립원옹에 의하면 특히 1923년, 이 고장 산왕방지 근처에서 처음으로 행해진 「오세도우」 패총의 학술적 발굴이래 부근 일대에서 계속 최근까지 발견되고 있는 즐목문토기·토사기·수혜기 등 이른바 승문식 토기 【주=일본의 신석기시대 문화의 대표적 유물. 전술한 미생식 문화가 시작하기 전 수천 년간 지속한 문화로서 금속기·농경을 아직 모르고 주로 석기·골각기로 수렵과 어로에 종사했던 시대의 문화】들의 출토는 이곳 주민문화를 항상 야만시하고, 낙후된 것으로 치지도외시하던 일본정사의 정설을 뒤엎는데 충분하고, 여기서 선사시대 이래 이곳과 대륙과의 교류가 지속했었음을 학인할 수 있게 해준다. 【주=일본 정사에서는 이곳 동북지방 주민을「에조」 (하이)라 하여 일종의「오랑캐」시 하고 역사기록에도 항상 이들을 징치하기 위한 정이 토벌군을 보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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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씨 전말기 석비도>
문제의 고려동전이 쏟아져 나왔다는 구안동성지는 바로 이 「후지사끼」 마을의 한복판에 있다. 지금은 주위에 인가들이 꽉 들어차 있지만, 그 사이에 남겨진 약 2천 평쯤 돼 보이는 공터가 바로 옛 성터라는 것이다. 인구에 준마상 석조조각의 봉납석대가 있고 고터 맨 끝에 「안동씨전말기」라 새겨진 자연석 석비가 서 있는 것이 그 내력을 말해주는 전부이다.
도시, 여기서 말하는 구안동성지니 안동씨니 하는 말부터가 한국의 경북 안동과 무슨 연관이 없겠느냐 싶던 소박한 의문에 대해 소립원옹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계속>

<차례>
제3장 동북지방의 한적문화탐방
제10화 고구려의 유풍남긴 팔호타구
제11화 등기마율의 고려동전얘기
제12화 추전미인과 북청미인
제13화 신석항에 서린 은수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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