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6) <제자 박순천>|제35화 「정치 여성」 반세기 (15)|박순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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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해방과 여성 단체>
일본 패전의 소식을 들은 것은 8월13일 저녁이었다. 그날 나는 황신덕과 함께 조선통신사 김승식 사장 댁에 가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나의 제자인 이계옥이 김 사장의 부인이었는데 그는 이 은밀한 소식을 전하러 우리를 부른 것이었다.
『두분의 아드님이 곧 돌아오게 됐어요』라고 이계옥은 말을 꺼냈다. 그때 황신덕과 나의 아들들은 학병으로 끌려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생전 춤이라곤 추어본 일이 없었는데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환희와 흥분 속에 갑자기 춤이 나오더니 영 그쳐지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15일이 되었다. 정오에 일본 천황이 중대 발표를 한다고 하는데 학교에는 「라디오」도 한대 없어서 우리는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견지동으로 나오니 한 민가에서「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슨 소린지 잘 들리지도 않았으나 아뭏든 『천황이 항복하는 소리』라고 서로 일러주며 우리는 울고 웃었다.
패전 소식이 전해지가 그 기세 등등하던 일본인들은 어깻죽지가 축 처져 가지고 불안하게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비단옷조차 후줄근하게 풀이 죽은 듯 했다. 바로 어제까지 우리 동포들의 뒷모습이 늘 그랬었다. 나는 그 당시 우리가 부르던 『나라 없이 살기를 원치 않노라』하는 노래가 새삼 실감이 나는 것을 느꼈다.
온통 거리는 환호하는 군중으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공연히 전차를 잡아타고 달리기도 하고 무작정 걷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나의 친구 중에 얌전하기로 이름난 한영숙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사람까지 화신 앞에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어서 그 경황 중에도 나를 놀라게 했었다.
그러나 13일에 그렇게 기뻐 춤을 추었던 나는 막상 15일이 되어 무질서한 환호 속에 휩싸이자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순간적으로 『이제 우리를 향해 공은 날아왔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을 놓치지 않고 잘 받아야 할까』하는 걱정이 가슴을 메웠기 때문이다. 나는 우선 계동 입구에 있던 몽양 여운형씨 댁을 찾아갔다.
여운형씨는 모시바지 저고리를 입고 있었는데 대님을 매지 않아 걸을 때마다 바짓자락이 펄럭펄럭했다. 모두가 기쁨과 흥분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때였으므로 아마 대님 매는 것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내가 물었으나 여운형씨도 워낙 갑자기 닥친 일이라 뭐라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방송국으로 가시오. 그래서 갈팡질팡하는 전국의 국민들을 진정시켜 방향을 잡도록 해주시오』라고 내가 즉흥적으로 제안을 했으나 우리는 결국 서로 격려만을 나눈 채 헤어지고 말았다.
해방되고 하루가 지난 16일 저녁 YMCA회관에서는 여성 단체를 탄생시키기 위한 준비 위원회가 열렸다. 나는 여기에 참석하기 위해 냉천동 집을 나와 서울 중학교 앞을 걷고 있었다. 그때 자전거를 탄 한 청년이 신이 나서 『선생님, 이 뒤에 타세요』라고 소리 질렀다. 온 거리가 숙제 「무드」였으므로 나는 얼른 올라탔다.
「커브」를 돌게 되었을 때 청년은 『꼭 잡으세요. 떨어지면 큰일납니다』라고 주의를 주었다.
「떨어져 죽은들 어떻소. 이제 나라를 찾았는데…』라고 내가 말하자 청년은 『그런 소리 마십시오. 나라를 찾았으니 이제는 정말 사셔야죠』하고 펄쩍 뛰었다. 우리는 군중 속을 기분 좋게 달려 종로 2가의 YMCA에 도착했다.
준비 위원회에는 박승호·유영준·황신덕·노천명·우봉언·이각경 등이 참석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7일에는 건국 부녀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 YMCA의 다른 방에서는 남자들이 건국 준비 위원회를 탄생시키고 있었다. 건국 부녀 동맹에는 1백여명이 참가했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독립 운동을 했던 여성들이었다.
황신덕과 나는 처음에 「건국」이란 말이 붙는 것을 반대했었다. 『우리 나라는 이미 있던 나라인데 무슨 건국이냐』고 우리가 극구 반대했을 때 유영준 등은 『남자들 쪽에서 건국 준비 위원회를 만들고 있으니 명칭을 통일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때 우리는 결국 공산주의자들에게 말려 들어간 것이었다. 그들은 그 소란통에 벌써 각본을 짜놓고 우리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조국 광복이란 숙원을 성취하기 위해 함께 독립 운동을 하던 동지들은 어느새 좌·우익이란 차가운 벽을 사이에 두게 된 것이다. 우리들로서는 예상 못했던 국면이었다.
건국 부녀 동맹은 후에 월북한 이각경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나를 부회장으로 뽑았다. 이래서 자연히 부녀 동맹의 본부를 우리 학교 안에 두게 되었다. 우리는 첫 사업으로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을 돌보았고 시국 간담회로 개최했다.
시국 간담회에 초청했던 한 강사는 강연 도중 『이번에 우리가 해방된 데는 소련의 공로가 크다』고 말했다. 그러자 청중 속의 한명이 벌떡 일어나 『미국의 공로가 더 컸다』고 가로막고 나섰다.
해방의 기쁨으로 춤추고 노래한지 이틀 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어처구니없는 갈등이었다. 해방의 기쁨 속에 조직된 여성 단체는 자연히 분열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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