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화 위한 사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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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사진을 안보고 지내는 날은 하루도 없을 것 같다. 오늘의 신문·잡지는 사진에서 날로 새로운 경지를 발견하고 있다. TV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글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도 사진은 볼 수 있다.
사진의 역사는 1백30년쯤 된다. 1840년에 발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사진술의 발명가 가운데 한사람인 「니에프스」는『자연을 가장·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술회했었다.
그러나 사진은 의외로 정확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자연을 묘사하는데는 오히려 무능한 일면이 있다. 그것은「렌즈」를 통해서 피사체를 보아야하는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엔 다양한 기능을 가진「렌즈」들이 발명되어「묘사」의 기능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진 것 갈다. 사진을 촬영하는 사람의 의사에 따라서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것이다.「몽타지」는 바로 그런 수법을 말한다. 해방후 임시정부 설 무렵 이승만박사와 김구선생이 정답게 고궁을 산책하는 사진이 신문에 실린 일이 있었다. 당시 시정인들은 두 거두가 정치적 화해를 한 것으로 착각했었다. 그러나 문제의 사진은 의도적인 「몽타지」였다. 사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2차대전때는 세계의 신문들이 「처칠」영국수상의 사진을 자주 실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감도는 사진이 실리면 자유세계에선 증권시장의 시세가 올랐다는 일화도 있다. 「처칠」의「미소」와「우수」의 표정은 편집자가 의도적으로 양자택일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역시 사진의 한계이다.
1950년대 일본의 사회당당수 「아사누마」는 전당대회장에서 한 우익청년에 의해 살해되었었다. 그매 자객이 그에게 칼을 들이대는 순간을 어느 기자가 사진에 담아 그것은「유명한 사진」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 사진은 칼을 찌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빼는 순간의 것이었다.
TV화면도 마찬가지이다. 언젠가 TV「세트」전을 본 적이 있었다. 「카메라」의 조작이란 정말 충격적인 것이었다.
사진은 악덕의 제물이 되는 수도 있다. 기묘한 일의 현장사진을 가지고 당사자를 협박하는 따위. 무슨 「데모」의 주동자를 가려낼때도 사진이 동원된다.
최근 우리나라 관가를 휩쓴 숙정은 그 대상자의 주택사진이 중요한 단서로 제시된 모양이다. 물론 그 사진들이 진상과 멀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진면목의 일면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진을 찍는 상황이 얼마나 객관적이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보다도 「부정」을 일목요연하게 사실화할 수 있는, 정확한 사진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문제는 그런 사진 따위에 있지는 않을 것 갈다. 도리어 주택이라는 허술한 「세트」뒤의 『보이지 않는 실상』이 더 궁금하다. 눈으로 보는「숙정」보다는, 마음으로 공감하는 숙정이 더 바람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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