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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아픔 그리움이 되었네 … 팔순시인 곰삭은 위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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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신경림 시인에게 카메라 하나 들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던 사진가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사진관은 꿈의 공장 같았다. 뭐든 가능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마음의 상처에도 ‘빨간약’이 필요하다면 이 시집이 제격이다. 신경림(79) 시인이 6년 만에 내놓은 신작 시집 『사진관집 이층』(창비)은 슬프지만 애끓지 않고, 아릿하지만 너무 아프진 않다. 그래서 한국 나이로 팔순, 시인으로 49년을 맞은 노시인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

 시집은 낡은 흑백사진첩 같다. 빛바랜 사진을 한 장씩 꺼내 가며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추억이란 마법의 옷을 빌려 입었음에도, 과거는 아름답지 않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신산의 순간으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먹먹한 마음이 인다.

 ‘이 지번에서 아버지는 마지막 일곱해를 사셨다/아들도 몰라보고 어데서 온 누구냐고 시도 때도 없이 물어쌓는/망령 난 구십 노모를 미워하면서/가난한 아들한테서 나오는 몇푼 용돈을 미워하면서//(중략)//돌아가셔도 눈물 한방울 안 보일/남편의 미운 짓이 미워 눈물 한방울 안 보일/아내를 미워하면서’(‘안양시 비산동 489의43 ’)

 시의 제목이기도 한 안양시 비산동 489의43번지는 그에게는 고통의 동의어다. 치매를 앓던 할머니와 중풍에 걸렸던 아버지가 대들어 싸우고, 실직으로 하는 일 없이 빈둥대던 마흔 언저리의 싫고도 싫은 나날로 가득하던 순간이었다.

 “1970년부터 7년 동안 거기서 살았는데 그 집에서 할머니와 아버지, 암에 걸린 아내까지 세상을 떠났어요. 사람들이 흉가라고 했지. 사찰이 심해서 형사가 매일 두 번씩 다녀가고 그러니 직장도 잡을 수가 없었고. 그런데 오래되니까 그때 이야기가 쓰고 싶어. 요즘도 가난하던 그때 꿈을 많이 꿔요.”

 가난과 시대의 격랑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겪어왔지만, 그의 말에는 날이 서 있지 않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이라고 한 그의 시 ‘갈대’처럼 조용히 울음을 삼켜왔던 듯.

 “시라는 언어로 걸러질 때는 부드러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는 옳은 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끌고 가는 것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그의 시는 옳게 들리고,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그의 대표작인 ‘농무’나 ‘가난한 사랑노래’를 떠올리지 않아도 힘없고 보잘것없는 이들의 곁에서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 덕일 터다.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라는 이 시가 이야기하듯.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고 하는데 인간은 살기 위해 세상에 나온 거지 기여하려고 태어난 건 아니에요. 거대 담론에 휩싸여 있는 게 불쌍하죠. 그런 말들 속에 희생당했던 사람들의 목숨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이 듦이 가져다주는 선물을 묻자 시인은 “나이 들면 감성도 둔해지고, 기억도 어두워지고 젊을 때만 못하다. 나이 들면 지혜로워지고 욕심도 줄어든다는데 그렇지도 않다”며 좋을 것 하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답은 그의 시에 있었다. 눈 밝아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게 된 그에게 세상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하늘에 별이 보이니/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별’)

글=하현옥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신경림=1935년 충북 충주 출생. 1956년 ‘문학예술’에 시 ‘갈대’ 등이 추천되며 등단. 시집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쓰러진 자의 꿈』 등. 만해문학상·대산문학상·호암상 등 수상. 한국예술원회원.

다시 느티나무가 신경림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기 시작한 때가 있다.
그때까지는 보이거나 들리던 것들이
문득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잠시 의아해하기는 했으나
내가 다 커서거니 여기면서,
이게 다 세상 사는 이치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
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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