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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 터널 벗어났더니 ‘볼커의 저주’ 새 족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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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호 06면

‘월가의 귀환’.

지난해 미국 월가은행 실적 좋기는 한데 …

 지난 주말까지 이어진 월가 초대형 은행의 실적 발표 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내린 평가다. 월가의 6대 은행이 지난해 올린 수익은 760억 달러(약 81조원). 전성기였던 2006년 실적과 60억 달러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지루한 각종 소송전과 유럽 재정위기 등을 감안하면 2008년 금융위기 악몽에서 비로소 탈출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덕분에 주가도 큰 폭으로 뛰었다.

 그러나 성적표의 내용을 뜯어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수익의 대부분이 매출 증가가 아니라 비용 절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우선 대출 부실을 우려해 쌓아뒀던 충당금을 확 줄인 게 주효했다. JP모건·뱅크오브아메리카(BOA)·씨티그룹·웰스파고가 지난해 줄인 충당금만 150억 달러. 부도율이 뚝 떨어진 게 충당금 축소를 가능하게 했다. 이자를 한 푼도 못 받던 돈을 대출이나 투자로 돌렸으니 수익이 늘어난 건 당연했다. 과감한 구조조정도 한몫했다. 2위 BOA는 지난해 9월과 10월 두 차례 모기지 사업에서 인력 3400여 명을, 웰스파고도 지난해 하반기에만 6200여 명의 직원을 내보냈다. 씨티그룹은 모기지 사업을 아예 패니메이에 팔아버렸다. 그러나 충당금 축소나 구조조정은 이미 마를 대로 마른 수건이다. 더 쥐어짜는 데 한계가 있다.

JP모건·골드먼삭스 마이너스 성장
은행별로 나눠 보면 희비는 더 극명하게 대비된다. 미국 최대 은행 JP모건의 지난해 4분기 수익은 1년 전보다 7% 줄었다. 지난해 각종 벌금·보상금으로만 무려 230억 달러를 쓴 게 결정타였다. 2008년 금융위기 후 월가의 황제로 비상했던 체면을 왕창 구겼다. 게다가 각종 송사에 휘말렸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판 죄목으로 지난해 11월 130억 달러를 물기로 했다. 지난해엔 파생상품 거래로 큰 손실을 입힌 이른바 ‘런던 고래(투자 담당 직원 브루노 익실의 별명)’ 사건으로 10억2000만 달러(약 1조8000억원)의 벌금을 물기로 했다. 지난주엔 금융 사기꾼 버나드 메이도프의 불법 거래를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죄로 26억 달러(약 2조8000억원)를 내기로 했다.

 게다가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 특권층 자녀를 특혜 채용했다는 혐의로 연방정부의 조사를 받고 있다. 리보(LIBOR·런던의 은행 간 단기금리)·환율 조작과 관련한 조사도 진행 중이다. 딕 보베 라퍼티캐피털 애널리스트는 “JP모건에 대한 소송, 벌금이 곧 마무리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가 우려될 정도”라고 말했다.

 월가의 대표선수 골드먼삭스와 모건스탠리 역시 지난해 4분기 각각 19%와 69.5%씩 순이익이 줄었다. 월가의 주특기인 트레이딩에 몰두한 금융회사는 지난해 죽을 쑨 셈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트레이딩 비중을 확 줄이고 대출과 자산관리 서비스 등 상업은행 업무에 주력한 은행은 활짝 웃었다. BOA와 웰스파고가 대표적이다. 충당금 감축에 따른 혜택을 최대한 활용한 덕분이다.

볼커 룰 피하려면 진화 불가피
최악의 위기에선 벗어났다지만 월가 앞엔 더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달 미 금융당국의 최종 승인을 받아 내년부터 시행될 ‘볼커 룰(Volker Rule)’이다. 은행이 자기 자산으로 주식·파생상품을 사는 걸 막고 헤지펀드·사모펀드 투자를 크게 제한하는 규제다. 증권업과 은행업을 겸영한 초대형 월가 은행이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만 믿고 무분별하게 위험한 파생상품에 투자했다가 파산하면서 미국은 물론 세계경제를 공황으로 몰아넣었던 전철을 밟지 말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월가로선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도입된 ‘글래스-스티걸법’에 버금가는 새로운 족쇄다. 글래스-스티걸법은 은행이 증권업을 하지 못하도록 규제한 법이다. 고객의 예금을 다루는 은행이 고수익만 좇아 위험한 투자를 일삼자 아예 증권업을 할 수 없도록 칸막이를 쳐버렸다. 그러나 이 법 때문에 미국 은행이 유럽 경쟁자에 밀린다는 비판이 들끓자 1999년 그램-리치-브릴리법 제정으로 글래스-스티걸법은 사실상 폐기됐다. 금융지주회사를 통해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업무를 겸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1998년 씨티은행과 트래블러스그룹의 합병으로 씨티그룹이 탄생하면서 월가의 ‘대마불사 신화’는 시작됐다. 합병을 통해 덩치를 키우고 첨단 금융공학까지 무장한 초대형 월가 금융지주회사들은 전 세계 금융시장을 평정하며 천문학적인 수익을 긁어모았다.

 그러나 볼커 룰로 월가 초대형 은행은 다시 한번 진화를 강요받게 됐다. 금융공학을 앞세운 ‘돈 놓고 돈 먹기 게임’에서 퇴장당한 이상 새 수익원을 찾아야 한다. 덩치만으론 유럽이나 중국·일본 거대은행을 상대하기도 버겁다. 특히 채권·통화·원자재 분야의 공격적 투자로 유명한 골드먼삭스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골드먼삭스는 ‘프롭 트레이딩(proprietary trading)’이라고도 불리는 자기자본 거래 비중이 매출의 50%에 육박한다. 볼커 룰이 시행되면 전체 매출의 25%가 타격을 받을 걸로 예상된다. 브래드 힌츠 알리안스번스틴 애널리스트는 “금융 규제가 강화되면 골드먼삭스의 실적이 둔화될 것이란 건 수학적으로 거의 확실하다”고 지적했다. 미국은행협회(ABA)는 지난달 24일 “볼커 룰로 인한 은행권 손실이 지나치다”며 연방준비제도(Fed)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등을 워싱턴DC 연방법원에 제소했지만 사태를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트레이딩 비중 낮추고 대출 확대 변신
BOA와 웰스파고 등은 일찌감치 변신에 나섰다. 트레이딩 의존도를 낮추고 헤지펀드나 사모펀드 투자도 단계적으로 줄여왔다. 브라이언 모니한 BOA 최고경영자(CEO)는 법안 통과 직후 “지난 4년 동안 헤지펀드 보유분을 매각해 왔다”며 볼커 룰 도입 이후에도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전통적인 은행 업무에 주력하는 회사 입장에선 금리 상승 추세가 순풍이기도 하다. 금리가 오르면 대출이자 수입이 늘기 때문이다.

 반면 금리 오름세는 모기지 대출이나 채권 매매엔 독이 된다. 지난주 기준 미국 은행의 30년 고정 모기지 이자율은 평균 4.75%. 지난해 10월 초 4.4%에 불과하던 금리가 두 달 남짓 기간에 0.35%포인트나 올랐다. 금리가 오르니 대출 수요는 위축됐다. 모기지 대출시장의 1·2위 웰스파고와 JP모건의 모기지 대출 실적이 반 토막 난 건 이 때문이다. JP모건의 모기지 매출은 지난 분기 233억 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54% 줄었다. 골드먼삭스도 주력 사업인 채권 매출이 확 줄었다. 금리 상승으로 채권 값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은행의 4분기 채권 매출액은 17억2400만 달러로 1년 전보다 15% 줄었다. 모건스탠리 역시 채권 거래 수익이 14%나 줄며 실적 부진의 원인이 됐다.

 Fed의 테이퍼링으로 인한 금리 상승기에 볼커 룰이란 새 금융 생태계까지 조성되면서 월가 은행들의 진화 노력이 본격화하고 있다.



볼커 룰(Volker Rule) 글로벌 금융위기가 은행의 무분별한 고위험 투자에서 비롯됐다는 문제 의식에서 나온 규제. 전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자 오바마 행정부의 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회(ERAB) 의장을 맡고 있는 폴 볼커가 제안해 ‘볼커 룰’로 불린다. 2010년 초 의회를 통과한 뒤 지난달 미 금융당국의 최종 승인을 받았다. 규제안은 ▶은행이 자기자산·차입금으로 주식·파생상품 등에 투자하는 걸 금지하고 ▶헤지펀드·사모펀드 투자를 자본금의 3% 이내로 제한하는 게 골자다. 올 4월 발효되지만 금융회사들이 대비할 수 있도록 시행은 내년 7월까지 유예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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