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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청빛 「이미지」-윤동주 론(4)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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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내용
1, 서언
2, 자의식의 심연
3, 순수의지의 「이미지」와 어휘적 사실
4, 자연과 대상의 상관관계 -
5,결어
어디로 가야 하느냐, 동이 어디냐 서가 어디냐 남이 어니냐 아차!
저별이 번쩍 흐른다. 별똥 떨어진 데가 내가 갈곳인가 보다하면 별똥아! 꼭 떨어져야 할곳에 떨어져야한다.
-『별동 떨어진데』
이것은 자기 현실을 깊은 비극으로 심화시킬 수 있는 상승적인 햇무리이다. 별똥같이 덧없이 흐르는 목숨, 그런 것을 어떻게 하면 생의 혼연한 합일감이나 자연과의 조화로 회복할 수 있겠는가? 눈에 보이는 세계 전체가 다만 하나의 상징이고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도록 준비된 것은 우리가 자기자신을 파악하므로 마치 더듬이를 잃은 곤충이 제 집을 못 찾는 가엾은 모습을 신에게 보이지 않기 위함인 것을.
신성한 생명의 원천과의 접속이 불가능할때 지상은 황폐해지기 마련이며, 하나의 시련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죽음이 올 때까지 징신을 물질에다 결부시키는 신비 고리』를 발견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의 시를 쓰는데 한 시인의 내적 체험이 얼마만큼의 표현과 결부 되는지는 의문이다. 윤동주의 「이미지」는 그 자연이 시간성과 영원성의 총합을 지향하고 있다.
잘 선택되어진 말, 이 말로 보강된 투명한「이미지」는 그 표현에 있어 훌륭히 성공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ㄱ)가람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있소. - 『무서운 시간』
(ㄴ)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가을·겨울
그런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빨간 꽃이 피어 났네
햇빛이 푸른데- 『태초의 아침』
(ㄷ)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버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별헤는 밤』
(ㄹ)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 『새로운 길』
(ㅁ)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꼬 나려 덮여
따라 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 『눈오는 지도』
위의 열 ㄱ· ㄴ· ㄷ· ㄹ· ㅁ에서 공통적으로 지적 할 수 있는 것은 자연에서 파생되는 온갖 현상을 인간의 상황과 접합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그 자연을 느껴서 표현하는 좀 뜨막한 관계가 아니라 자연에 합치는 깊은 공오의 세계로 같이 침잠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과 ㅁ에서 가랑잎과나, 발자욱과 꽃의 「이미지」는 그 결합이 암시적이고 내부적인 심도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 그것은 사물의 내면적 해부와 점층적인 사고속에서 발전된 형태로서 인간의 거리의식과 자연이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가랑잎과 나><그늘과 여기>는 공간과 사물의 대비로 하늘이 목표가 되고 있다. 계속하여 ㄴ·ㄷ·ㄹ에 숨겨진 관념의 경우 서술을 통하여 자연현상∼좌절∼탈주·희망의 도식으로 되어있다.
인간의 문명이나 교육같은 인위적인 것을 떠나서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태초의 생명의 세계에 깊이 경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자연에 대한 깊은 인식과 그것에 의해 보다 밀착된 언어 영역의 비경을 들여다 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비로소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5,결어
모든 사물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은 사물과의 거리를 뜻하며 그것은 때로는 물리적이며 때로는 내적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윤동주의 시에서 우리는 영혼적인 것을 소유하고 또한 그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 같은 것을 보았다. 불안하고 잡힐 듯 손에 잡히지 않는 순수현상과 바람처럼 지나가는 그런 동요 속에 그의 시의 영속성은 내재해있고 거기에서 윤동주의「이미지」는 탄생하고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메타포」 나 「이미지」를 사물의 순수한 존재를 끌어내는 용기로 사용하고 있다. 그의 시적인 창조는 그의 「이미지」에 잘 나타나있다.
미에 대한 예리한 감수성으로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의 대립을 잘 적응시키고 있으며 무의식이 주는 「이미지」와 감성이 잘 어울려져 있는 것이다. 그는 언어에 대한 그의 특유한 감각을 통하여 그의 시어들을 투명히 드러나게 하고있다.
그에게는 두개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의 정신적인 내부세계에는 항상 그 두개의 세계로 인한 갈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두개의 세계, 사물로부터 소재를 받아들이는 현실의 세계와 그것을 받아들여 형성된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그의 시의 「이미지」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삶의 언저리에서 언제나 머뭇거리며 떠나지 않는 그림자처럼 형상화되는 것이다.시인 윤동주의 고독은 이러한 2중적 구조를 벗어나려 한 데서 시작되고 있다.
비극의 어둠속에 갇혀 움직이지 않는 나로부터 새로운 시도를 하려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시에 대한 어떤 관념을 의식하고있다면 그것은 무엇이어야할까.
「콜리지」는 「셰익스피어」애 관한 강의론에서 현대시의 원리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된 천재의 작품은 그 자체의 알맞은 형식을 결하는 일이 없고, 그러한 어떤 위험도 없다. 작품이 법칙없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천재도 법칙없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자신의 독창력의 법칙에 따라 창조적으로 활동하는 힘, 그것이 바로 그 자질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는 여러가지 언어가 특별한 영향 밑에 이루어지는 신비한 변형같은 것이다.
도무지 무신경한 무기물들까지 윤동주의 시는 그 생명을 흡수하고 있는 현상이니까 그 물줄기의 풍성함을 다시 확인한 셈이 되겠다. 자연과 어둠의 배경에서까지 살려내는 의지, 그의 시세계에서 우리는 모든것이 시화되는 비밀을 알게 될 것이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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