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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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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벌써 1월 중순이다. 하지만 아직 2014년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새해가 엄연한 현실임에도 내 생각은 여전히 2013년을 맴돌고 있다. 해가 바뀐 지가 얼마 안 되었으니 이 정도는 이해할 만하다.

내 주변에는 오년 전 아니 십년 전에 살았던, 질긴 세월의 끈을 놓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 그때의 기억과 후회를 머릿속에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오늘을 과거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후회와 미련, 그리고 아쉬움을 남겼던 과거의 일들. 시간 이동을 해서 바꿀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안타깝게도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시간 여행을 소재로 촬영한 영화들이 꽤 많다. 1987년의 ‘백 투 더 퓨처’에서 2013년의 ‘어바웃 타임’까지. 현실적 불가능과 간절한 바람 사이에서 시간을 넘나드는 영화들은 흥행을 하고 있다.

이따금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나는 이런 영화들을 보면 재미가 있다. 2013년에 본 여러 영화 가운데 리처드 커티스 감독의 ‘어바웃 타임’은 여태껏 생생한 기억으로 떠오른다. 스펙터클한 장관은 없지만 잔잔하면서도 여운을 남기는 이 영화는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에 관해서 반추하게 한다.

 ‘어바웃 타임’을 보면 시간 여행에 대한 묘사가 좀 다르다. 먼저 과거로 가는 방법이 간단하다. ‘백 투 더 퓨처’처럼 엄청난 속도로 시간을 거스르는 타임머신이 필요치 않다. 단지 어두운 옷장 속에서 주먹을 꽉 쥔 채 돌아가기 원하는 과거를 떠올리면 된다. 과거로 가는 이유도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기 위하여 삶의 리플레이를 시도한다.

 내게도 시간 이동을 하고 싶은 과거가 있다. 철부지였던 나는 친구들과 여행을 하느라 아버지가 운명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 여행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한마디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한 나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에 쓰라린 멍울을 안고 산다.

‘어바웃 타임’에서는 폐암에 걸린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마지막 시간 여행을 떠난다. 부자가 같이 과거로 돌아가 정답게 해변을 산책하는 장면을 보면서 울컥했다. 나도 저렇게 과거로 돌아가 아버지의 손을 잡아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영화를 보고 내친김에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라는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시간 이동을 하는 타임리프의 능력을 우연히 얻은 여고생 마코토가 좌충우돌한다는 내용이다. 마코토는 과거로 돌아가 후회되는 일은 바꿨지만 그로 인해 더 큰 위험과 사고가 닥쳐온다. 이 애니메이션은 지나간 과거가 풀기 어려운 실타래와 같다는 점을 시사한다.

 시간은 원인과 결과가 하나로 연결된 실오리가 아니다. 수많은 사실들이 꼬이고 엉킨 실타래인 것이다. 과거의 한쪽을 풀었다 해도 다른 쪽이 엉키는 실타래는 그냥 세월 속으로 흘려보내는 것이 낫다. 새해가 되었지만 지난해에 못 이루었던 일들이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지난해는 돌이킬 수 없는 묵은해일 뿐이다. 혹 기쁘고 행복했던 과거라 해도 리플레이가 안 되는 것이 시간의 법칙이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을 위해 열심히 살아 보자. ‘어바웃 타임’에서도 주인공은 지난 하루를 다시 한번 살아본다. 과거를 고치기보다는 매일 최선을 다하여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2013년의 묵은 기억과 감정으로 오늘을 살아갈 것인가. 2014년의 희망찬 미래를 기약하는 오늘을 살아갈 것인가. 어려운 선택이 아니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