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회원 들 숫자풀이로 욕하는 노래 웅변가론 김필수·김 일 선·김창제 꼽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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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삼대웅변가
한· 일 해방 이후 국민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일진회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숫자풀이 야유를 했다.
일 (1) 없는 일진회가
이 (2) 세상에 왜 생겼노
삼 (3) 천리 반도 빛낸다더니
사 (4) 설만 남았구나
오 (5) 색 잡놈 다 모여서
육 (6) 조만서 드러내더니
칠 (7) 칠치 못한 잡놈들이
팔 (8) 뚝춤만 추는구나
구 (9) 구이 생각해보니
십 (10) 퍼런 도둑놈들이라
이런 노래가 민중들의 입에서 불리어지다가 3·1만세가 터졌다.민중들은 금방 독립이 오는줄만 알았다. 그래서 2천만 동포는 순정을 모아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치려 했다.그러나 3·1운동의 꽃다발은 야단스런 일본제국주의 군마의 발굽에 채여 여지없이 유린되고 보니 일부 민중은 극도로 실망했다.3·1운동의 실패는 곧 민중의 대파산을 의미했다. 금방 찾을 것 만 같던 독립은 수포로 돌아가고 지도자들은 투옥된 채 석방을 기약할 수 없게 되자 일반 민중은 실고와 비애와 자포자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에 노래 하나가 또 유행되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인가 부귀와 영화를 누렸건만 네 맘이 족할까
담소화락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골몰하여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네 맘이 족할까!
누구의 작사이며 누구의 작곡인지도 모를 이 노래는 유흥가와 학생계와 지식인 층을 열풍처럼 휩쓸었다.
이 때의 작가 오상순은 192O년 『폐허』 창간지 에다 「우리조선은… 폐허 속에는 우리들의 내적 외적 물적 모든 불평 결핍 결함 공허 불만 우울 한숨 걱정 근심 슬픔 아픔 눈물 멸망과 사의 악이 싸여있다」 고 썼다.
이 붐을 타고 밖에서 들어온 것이 서구의 자유주의·허무주의· 무 정부주의· 공산주의· 퇴폐주의 등이었다.이것들이 본래부터 있던 민족주의·신전기독교와 석여 민중은 더욱 정신 을 잃었다.
그리고 안에서 일어난 운동이 있었는데, 그것이 곧 조선·동아 두 신문과 형구운동·민립대학운동· 소년척후대운동· 금주단연운동· 물산장려운동· 신간회운동· 「멤 마크」식 농촌 운동 등이었다.이것들은 다 l920년대의 초기 또는 중기에 일어난 운동이었다. 그런데 이것들이 다 YMCA와 직접·간접으로 관계안된 것이 없었다.
이때에 YMCA에는 새사람의 웅변가가 유명했다.김필수 김일선 김창제 등 세 김 씨였다.
김필수는 복사이며 준학자이면서 얼큰 하게 술에 취하면 더 말 잘하는 호탕한 웅변가였다.
김일선은 장로로서 어장은 짧게, 그러나 조리있게 권위있게 말하는 웅변가였다 김창제는 평신도로서 교훈적이며 예언자적인 웅변가였다. 이 분들이 다 말만 유창하게 할 뿐 아니라 그 생활도 깨끗했다.
금주단연운동때의 일이다고 뭍론 이 세 사람은 계몽 연설을 했다. 민중은 감동하여 담뱃대를 꺾어버리는 사람도 나오고 짬지와 궐련갑을 강연대 위에다가 바치면서 금주 단언을 결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일반민중은 YMCA안에는 「낮에는 금주당, 밤에는 음주당」도 있고 「밤낮 금주당」도 있고 「밤 낮 음주당」도 있다고 야유를 했다.허나 이것은 YMCA가 나쁘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도리어 일반교회와는 달리 호탕한 점이 있어 좋다는 풍자였다.
이상재옹도 담배를 피웠었다.허나 아무데서나 피우진 않았고 될 때와 안될 때를 가려서 피웠다고
물산 장려운동때의 일이다.이것은 곧 국산품 애용운동인 동시에 일화 배척 운동이기도 했다.YMCA강당에서는 전기3대 웅변가가 열변을 토했다.맨 나중에 계상재옹이 나섰다.첫 마디로 하는 말이『여러분!일본사람 들이 말 잡아 먹는 것을 왜 시비를 하우? 그 사람들은 개 닭 같아서 잡아먹는데 우리도 우리 닭 길러서 잡아먹으면 될 것이 아니요?』했다. 다른 연사 들은 길게 설명을 하면서 열변을 토했지만 이상재옹은 수수한 얘기조로 문제의 중심을 찔러서 감명을 주었다.
김창제는 일제에게서 공작·자작과 갈은 벼슬을 받은 사람들을 신랄하게 때렸다. 그는 그 사람들을 짐승에다 비교하여 공후 백자남이라고 풍자했다.즉 공작은 겉모양만 훌륭한 공작 같은 사람,후작은 원숭이 같은 놈,백작은 곰 같은 놈,자작은 쥐새끼 같은 놈,남작은 사내새끼 같은 놈이라고 욕했다.
1926년 김윤식이 별세했을때의 일이다.그는 본래 충신이며 학자이며 애국자였다.하나 그도 역시한·일합병후 일제에게서 자작이란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그는 이를 후회하고 작위를 반환해서 민중의 존경을 받았다고 그래서 그가 죽자 박영효 등이 주동하여 그를 사회장으로 모시려고 했다. 규모면에 다른 사회단체들은 나라를 망하게 한 분 한국의 대신을 사회장으로 함은 안된다고 맹렬하게 반대했다.따라서 장의본부에는 매일 같이 투서가 날아 들어오는데 「개 같은 놈」이라고 그를 욕했다고 이에 이상재옹은 태연스럽게 『그래도 대접해서 말했는걸!』했다. 이말 을들은 장의 본부에 앉았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아니 개라고 욕한것이 대접해서 했단 말씀입니까?』하고 반문을 했다. 이에 이상재옹은 『그래도 개는 주인을 아니까 말이지요』했다.이 말은 임금도 모르고 나라도 지킬 줄 모르는 자들이 더 망국대부를 욕한다는 풍자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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