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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필·이광재의 여야 동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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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실세(實勢)는 반드시 실세(失勢)가 된다. 권력의 속성이다. 이광재는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고 37세에 실세란 말을 들었다. 그 시절 그는 ‘권력은 칼날 위에 묻은 꿀’이라고 말하곤 했다. 너무 일찍 칼날 위의 꿀맛을 본 그를 9일 만났다.

 -권력의 금단현상은 없나.

 “보시다시피. 자유인으로 잘 지낸다.”

 -금단현상 가운데 가장 참기 힘든 게 뭘까.

 “잊혀지는 거겠지.”

 그는 스스로 잊혀지길 원했다. 그간 정치권을 떠나 중국 칭화대 공공관리대학원에서 객좌교수로 활동했다고 한다. 칭화대?

 -참, 중국 공청단(공산주의 청년단) 인맥은 연줄이 다 끊어졌겠네.

 “아닌데?”

 2003년 7월 한·중 정상회담 합의사항 중 하나가 ‘청소년교류 활성화’였다. 늘 하는 소리다. 하지만 열린우리당 초선의원이던 이광재가 청소년교류 활성화를 위해 2004년 베이징에서 공청단 쪽과 접촉했다. 잘 알려지진 않은 얘기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게임리그’다. 2005년 IEF(International e-Culture Festival)란 게 창설됐다. 게임을 고리로 중국 권력의 산실인 공청단과 얽히는 게 목적이었다. 이광재가 IEF 한국 위원장을 맡았다. 중국 위원장이…후춘화(胡春華)였다. 63년생. ‘리틀 후진타오’, 시진핑 다음 주석이 유력하고 못 돼도 총리라는 그다. 현재 광둥성 당서기다. 중국 386세대의 선두주자인 그와 386실세였던 이광재가 게임을 통해 ‘관시(關係)’를 맺게 됐다. 그러나 정치트랙이 달랐다.

 ‘1987년 5년 대통령 단임체제’ 아래 이광재는 2007년 잃을 실(失)자 실세로 신분이 바뀌며 성장통을 겪은 반면 후춘화는 무럭무럭 컸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였다.

 “2008년 이광재 의원이 연락을 해왔다. 야당이 됐으니 IEF를 하긴 힘들게 됐고, 중국도 여당과 접촉하길 원할 테니 중국에 관심이 많은 나더러 맡아달라는 거였다.”(남경필 새누리당 의원)

 정권교체기엔 ‘인수’가 아니라 ‘접수’ 작업이 벌어진다. 현재 권력은 과거 권력을 무시하고, 과거 권력은 현재 권력이 잘되는 걸 배 아파한다. 자주 거론되는 87년 체제의 한계 중 하나는 5년마다 정권이 바뀌면서 축적한 자산이 ‘0’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끝자락에서 저런 일도 벌어졌다. 남경필은 이광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술 더 떠 ‘동업’을 제안했다. 지금 IEF는 남경필·이광재 공동위원장 체제로 잘 굴러가고 있다.

 이광재 단독에서 ‘이광재-남경필’ 콤비로 진화한 결과 파이는 더 커졌다. 후춘화가 제주도로 오고, 두 사람이 같이 중국을 가고…. 그게 거의 10년째다. 후춘화뿐 아니라 또 다른 차기 주자 저우창(周强·60년생) 최고인민법원장, 루하오(陸昊·67년생) 헤이룽장성 성장도 그런 멤버다. 남·이 두 사람은 한반도 통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러시아 386과도 이런 식의 네트워크를 구상하고 있다. 어차피 중국도, 러시아도 2020년대엔 60년대생의 시대가 온다.

 박근혜 대통령은 얼마 전 “통일은 대박”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박이 절로 날까. 개미들의 피땀이 있어야 한다. 김정일은 2011년 생애 마지막 방중 때 당시 네이멍구 서기장이던 후춘화를 공식적으로 만났다. 후춘화로선 김정일 세대보다 한국의 386이 더 통할 수 있다. 남·이 두 사람이 중국 386리더들에게 핵을 가진 북한보다 통일한국이 이롭다는 걸 이해만 시켜도 대박이다. 남·이는 나이(65년생)만 같다. 이광재는 학생운동권 출신이지만 남경필은 비운동권이었다. 정당도 다르다. 이광재는 열린우리당 실용파, 남경필은 한나라당 쇄신파였다. 극과 극이 통하는 것처럼 양당의 쇄신파와 실용파는 동업이 가능함을 보여줬다. 이런 동업이 새 정치고 소통 정치다. 실세(失勢)도 이모작에 성공하면 다시 실세(實勢)가 될 수 있다.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