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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 창업 "왕년엔…" 생각 잊어버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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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9면

50대 안팎의 퇴직자가 쏟아지면서 고령자 창업이 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인생을 정리해야 할 60고개를 앞두고 창업 전선에 나가는 이른바 '황혼(黃昏)창업'이다. 황혼창업 대열에는 특히 중견기업 오너 사장이나 대기업 임원 출신들도 합류하고 있다. 인생 이모작을 위해 '품위 유지'란 외투를 벗었다.

창업 컨설팅 업체인 가자창업의 장성배 대표는 "하루에 3~4명의 50대 퇴직자가 찾아오고 있다"며 "이들은 안정적인 수익을 바라볼 수 있는 업종에 관심이 크다"고 말했다.

◆중견기업 오너에서 음식점 주인으로=서울 연희동에서 샤브샤브 전문점을 낸 전우성(57)씨. 전씨는 1970년대 중동 붐을 업고 리비아.이란 등에 조립주택을 건설하는 우성중공업이란 회사를 운영했다.

이 회사는 80년대 초반에 매출 4백억원을 올렸고 직원 수도 2천명이 넘었다. 거제도 대우조선에 세워진 초대형 크레인도 전씨 회사가 설계한 것이다. 이 크레인은 한번에 9백t을 들어올릴 수 있는 것으로 당시는 세계에서 가장 힘센 설비였다.

그러나 중동 붐이 사그라지고 건설 현장에서 사고가 잇따라 터지면서 90년 부도를 냈다. 전씨는 재기하기 위해 쌀가공 식품사업에 손댔다가 재미를 못봤고 민간 병원에서 월급쟁이 생활을 하기도 했다.

마음을 다잡지 못해 아버지가 운영하는 지방의 정미소의 일도 거들고 겨울 올림픽 쇼트트랙 종목에서 금메달을 4개 딴 맏딸 전희경 선수의 뒷바라지를 하며 쓴 마음을 달랬다. 마음을 고쳐 먹고 서울 연희동에 샤브샤브점을 낸 것은 2001년 1월. 그는 집안에서 1억5천만원의 자금을 빌려 가게를 차렸다. 그러나 가게가 들어선 곳이 주택가 골목인 데다 문을 열자마자 광우병 파동까지 겹쳐 고전을 했다.

전씨는 "중견기업의 주인 행세를 하다가 마음을 비우고 연 음식점마저 장사가 안되니까 실의에 빠지기도 했는데 생각을 바꾸니까 길이 보였다"고 말했다.

전씨는 쇠고기 대신 해물과 오리고기에 갖가지 채소를 곁들인 신종 샤브샤브를 개발했다. 새 메뉴가 입소문을 타며 단골이 늘어났고 지금은 한달에 5천만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는 "회사가 잘 나갈 땐 외제차를 타고 다녔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걱정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지금 조그마한 식당을 운영하지만 더할나위 없이 마음은 편하다"고 말하며 "'환희'란 상표를 곧 등록해 샤브샤브점의 전국적인 프랜차이즈 사업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화장 소품 만드는 대기업 임원=10년 전에 퇴직한 김성만(64)씨는 틈새시장을 겨냥해 창업한 케이스. 그는 ㈜금호 무역부문에서 20년 이상 일했다.

홍콩지점 근무 때 이스라엘 상인들과 접촉을 많이 했는데 이들이 여성을 상대로 한 사업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고 회사를 나오자마자 바로 손톱 손질용 브러시 등과 같은 여성용 화장 소품을 개발해 화장품업체에 납품하는 사업을 벌였다. 향남산업이란 간판을 내걸고 2억원을 들여 가내수공업 형태의 공장을 차린 것이다.

그는 개발한 제품 세트를 들고 화장품업체의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린 끝에 가까스로 납품권을 따냈다고 한다. 최근에는 화장품 대리점으로도 사업 영역을 넓혀 한달 4천만원대의 매출을 올리며 남에게 신세를 안지고 산다고 했다.

김씨는 "늦깎이 창업을 할 때는 지나친 욕심보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며 "최근 값싼 중국산 화장 소품들이 국내에 쏟아져 새 사업아이템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 황혼창업 어떤 것을 주의해야 하나=창업자금이 얼마냐에 따라 업종이 달라질 수 있다. 다만 지나치게 유행을 타는 업종이나 시장에서 검증되지 않은 사업은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 창업컨설턴트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특히 대리점형 사업 가운데는 물품 보증금을 현금으로 내는 사업은 피하는 것이 좋다. 시장성이 없는 제품일수록 현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전문성이 필요한 업종은 체인가맹이 유리하고 권위의식을 버리고 고객 눈높이에 맞춘 경영자 마인드를 길러야 한다. 또 성장 위주로 사업을 벌이기보다는 안정적인 수익이 기대되는 업종을 고르는 것이 낫다.

고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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