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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P로 닥쳐올 일본 쓰나미에 대비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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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설파했듯 가치중립적 언어란 없다. 돌·곰·사과 같은 단어에도 켜켜이 역사가 쌓이면 특별한 감정이 스며든다. 하여 때론 이름이 중요한 몫을 한다.

 지난해 9월 미국 백악관이 언론에 특별요청을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백악관은 ‘오바마케어’로 통해온 의료보험 개혁안을 ‘적정의료보험법(ACA)’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이름에 서린 괴력 탓이다. 오바마케어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체취가 너무 독했던 거다. CNBC가 800여 명을 놓고 조사했더니 결과가 묘했다. 먼저 절반에게 ACA를 지지하느냐고 물었다. 찬성 22%, 반대 37%였다. 나머지 반에게 내용은 같되 이름만 다른 오바마케어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했다. 그랬더니 찬성 29%, 반대 46%, 찬반 모두 확 늘었다. 오바마란 이름에 빠져 덮어놓고 좋아하거나 싫어했던 거다.

 이런 ‘간판 바꿔치기’는 이미지 개선을 위해 흔히 쓰는 트릭이다. 지난해 국회에서 방사성폐기물관리공단을 원자력환경공단으로 개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때밀이를 신체청결사로, 신용불량자를 채무불이행자로 바꾼들 본질이 변할 리 없다. 하나 대중은 단어가 뿜어내는 환영에 쉽게 홀리는 모양이다. 요즘 불거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 문제가 딱 그렇다.

 TPP는 환태평양이란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다. 그러나 맺어지면 한·일 FTA 체결과 비슷한 결과를 낼 거다. 한국은 12개 TPP 후보국 중 미국 등 10개국과 FTA를 맺었거나 협의 중이다. 나머지는 일본, 멕시코뿐. 한·멕시코 교역량은 한·일 간의 10% 수준이다. 그러니 “TPP=한·일 FTA”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일 FTA 협상은 지난 2004년 진행된 적이 있다. 일본이란 이름이 주는 거부감 때문인지, 그땐 쑤셔놓은 벌집이었다. 현대차 노조에 전경련까지 극력 반대했다. 자동차·기계 회사 다 죽고 무역적자가 폭발할 거라 아우성이었다. ‘한·일 FTA 반대 원정투쟁단’ 90여 명은 도쿄 외무성 앞에서 농성까지 했다. 서슬 퍼런 반발에 정부는 꼬리를 내려야 했다.

 그랬던 이 나라가 TPP란 포장에 현혹된 탓인지 10년 만에 사실상 한·일 FTA를 하자는데 야당은 물론, 시민·노동단체마저 적막강산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유무역화가 되면 한국이 밑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잖다. 무엇보다 양국 산업구조가 너무 닮아 동종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질 수 있다. 미국·중국에서 불붙는 삼성-소니, 현대-도요타 간 싸움을 보라. 긴 설명이 필요 없다. 큰 폭으로 관세가 떨어져도 한국이 불리하다. 2011년 기준 한국의 평균 관세율은 12.1%. 일본은 반도 안 되는 5.3%다. 양측 관세를 똑같이 낮추면 누가 더 타격을 입겠나. 대일 무역적자는 아베노믹스가 본격화된 지난해부터 급증했다. 엔화 약세 탓이다. 이참에 관세 장벽을 허물면 적자폭이 얼마나 늘지 가늠이 안 된다.

 더 큰 걱정은 TPP에 뒤늦게 들어가면 제3자가 만든 틀을 고스란히 받아야 한다는 거다. 한·미, 한·일 FTA와 같은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은 ‘맞춤양복’과 같다. 형편에 맞게 개방 시기, 관세율 등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무역기구(WTO)·TPP 같은 다자체제는 다르다. 창설단계에 못 끼면 기존 틀에 자신을 끼워 넣어야 한다. 웬디 커틀러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보는 지난달 “TPP 협상이 최종단계라 한국 참여가 매우 어렵다”고 밝혔었다. 안 맞는 기성복을 억지로 입을 판이다.

 그럼 어쩔 것인가. 논란 속에서 TPP에 참여키로 한 이상 최대한 실속을 차리는 게 옳다. TPP의 핵심이 한·일 간 자유무역화인 만큼 이에 따른 부작용을 줄이되 이문을 늘리는 묘수를 찾아야 한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13일부터 미국·멕시코·칠레 등 6개국과 TPP 참여와 관련된 양자협상을 벌인다. 비록 늦었지만 TPP의 터를 닦는 데 낄 수 있다면 한·일 무역자유화에 따른 부작용을 줄일 수 있을 터다.

한물간 일본 정치인 망언에 핏대 세운들 뭐하나. 까딱도 안 하고 막지도 못한다. 그보단 닥쳐올 일본발(發) 경제 쓰나미에 대비하는 게 백번 더 긴요하다.

남정호 국제선임기자